디지털 세상 부유하던 조각들… 가상과 현실의 경계 잇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1990년대 중반 인터넷 기반 ‘넷 아트’ 등장
온라인 속 미술 재료 활용해 작품 재창조
노상호 작가, ‘더 그레이트 챕북’ 등 통해
아날로그 세상 디지털 유목민 시선 그려
석고 활용, 디지털과 대비되는 질감 강조
붓 대신 물감 분사해 ‘손의 흔적’ 최소화
AI와 협업… 창작 주체 향한 고민 담기도
#온라인에서 구전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녀의 저주에 걸려 있었는데….”
노상호(37)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곤 했다. 맑은 수채화 붓으로 그린 그림과 함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선보이는 방식이었다. 청량한 보색을 섬세하게 배치한 회화가 이야기와 어우러졌다. 글과 그림은 온라인에서 구전되듯 퍼져 나갔다. 매 순간 업데이트되는 피드 위에서 이야기는 때로 결말 없이 흩어졌다. 몇몇은 잊혔고 다른 몇몇은 조각난 장면으로서만 남았다. 하지만 굳이 끝맺지 않아도 괜찮았다. 매일 올라오는 노상호의 작업을 많은 사람이 좋아했다. 결말이 궁금할 때 즈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냈다. 온라인은 이런 곳이라고, 이곳의 창작은 이렇게 소비된다고 우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인터넷 기반 미술은 1990년대 중반 ‘넷 아트’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재료를 활용하는 미술을 가리킨다. 결과물이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으며, 원본성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후 뉴욕의 작가 머리사 올슨(46)이 ‘인터넷 이후의 예술’(2006)과 ‘포스트 인터넷 아트’(2008)라는 표현으로 동시대 인터넷 기반 미술을 아우르는 명칭을 제안했다. 그 흐름의 대표 작가 아티 비어칸트(37)는 포스트 인터넷 아트가 ‘기술 매체 물질성을 강조하는 뉴미디어 아트와 무형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개념미술 사이의 미술’이라고 했다(2010).
한국 미술계가 포스트 인터넷 세대에 주목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이다. 주로 1980년대 출생 작가들을 지칭하면서다. 이들은 ‘신생공간’ 활동의 주역이기도 하다. 젊은 미술인들이 설립 및 운영한 자생적 전시공간을 일컫는 말이다. 제도권 밖에서 운영됐다는 점에서 선배 세대 ‘대안공간’과 유사한 한편, 온라인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오프라인 전시장은 스마트폰 지도가 없으면 찾기 어려운 도심 속 유휴공간에 마련되었다. SNS 안에서 연대를 형성하는 면모 또한 두드러졌다.
노상호가 온라인에 연재하듯 선보인 그림들은 ‘데일리 픽션’(2011∼)이라고 불렸다. 날마다 한 장씩 습관 들여 그린 A4 크기 작업이 이제 수천장 규모의 연작으로 거듭났다. 소재가 마르지 않는 까닭은 그림의 재료가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이기 때문이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식들, 저화질 사진들, 주인 없는 이야기들이 영감이 된다.
노상호의 그림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를 오가는 하이브리드 회화다. 작업은 무작위로 수집한 디지털 이미지를 출력한 후 먹지를 사용해 종이에 베끼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기의 여정 가운데 원본 이미지는 본래와 전혀 다른 결과물로서 재구성된다. 완성된 그림의 복사본은 인터넷에 다시 업로드된다. 디지털 정보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재해석한 뒤 또 한 번 디지털로 변환하는 작업이다. 달리 말하면, 디지털을 활용하면서도 아날로그 몸짓을 끝내 버리지 않는 태도다. 그가 아날로그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오늘의 디지털 유목민이기에 그렇다. 매 순간 휘발하는 가상세계의 속성을 현실의 몸으로 소화해 내는 일이다.
노상호가 올해 제작한 신작을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서 선보인다. 1일부터 진행 중인 ‘낭만적 아이러니’는 기관이 소격동에서 원서동으로 이전 재개관하여 여는 첫 단체전이다. 출품작의 제목은 모두 ‘더 그레이트 챕북 4 - 홀리’(2023)다. 노상호는 자신이 영매라고 상상했다. 작업 과정이 마치 가상의 유령을 현실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 같아서다. 두 세상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을 떠올렸다. 기술적 오류에 의해 나타나는 디지털 이미지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우연한 자국들에 대하여서다. 실체 없는 것들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화가의 마음은 신비로운 믿음을 좇는 사람들의 열망과도 닮았다.
가상은 현실이 되고자 하고 현실은 가상을 신성시한다. 스크린이 촉각적인 현실을 흉내 내는 동안 화가는 환영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노상호는 최근 에어브러시를 자주 사용한다. 붓 대신 스프레이 형식으로 물감을 분사해 채색하는 도구다. 손의 흔적을 적당히 숨겨 디지털처럼 매끈한 화면을 얻어낼 수 있다. 한편 특수 안료와 석고 등 두꺼운 질감의 재료를 화면에 덧바르기도 한다. 디지털과 대비되는 회화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역설적 시도다.
가장 큰 규모의 출품작은 두 개 캔버스를 나란히 맞대어 그린 회화다(그림1). 다채로운 도상들이 화폭을 메운다. 화면의 연결부를 유심히 보면 조금씩 어긋난 불협화음이 눈에 띈다. 노상호는 그림의 크기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매일의 기본 단위를 유지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하나의 화면을 여러 구획으로 나눈 뒤 각각 하루의 시간을 할애하여 작업했다. 그러다 보니 부분마다 시차가 발생했다. 표현에 차이가 생겼고 생각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 차이를 강조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화면 경계를 완벽히 이어 그리지 않게 됐다.
굴뚝에서 피어난 연기가 눈부신 광고풍선처럼 흔들린다(그림4). 한동안 자주 보인 춤추는 풍선도 이제는 낯선 것이 되었다. 오늘의 광고는 유튜브 채널 가운데서, 인스타그램 피드 위에서, 인터넷 기사 허리춤에서 더 큰 수익을 내니 저 풍선이 힘들여 춤출 이유도 없다. 많이 그립지는 않다. 세상은 원래 변하니까. 가상현실 시대의 초입에 선 우리는 호기심의 크기만큼 주저한다. 신비로운 것들에 대해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다. 노상호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우리의 세상은 이미 이런 곳이라고. 그러니 몸을 던져 있는 힘껏 유영해 보자고.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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