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교복 담합? 걸려도 하나도 안 무서운 이유

임태우 기자 입력 2023. 2. 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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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자녀가 중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학부모 A 씨는 최근 학교가 안내한 교복 대리점을 찾아가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해당 교복 대리점이 작년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입찰 담합했다가 적발된 업체로 버젓이 보도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A 씨는 어떻게 담합한 업체가 불과 1년도 안 돼 학교 교복 선정 업체가 될 수 있느냐, 거기서 교복을 믿고 사도 되는 거냐며 불안해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작년 4월 서울과 경기 지역 12개 교복 대리점이 11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상대로 2016년 8월부터 2020년 9월까지 교복 구매 입찰에서 낙찰 예정자와 투찰 가격을 담합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대리점들은 교복 구매 입찰에서 낙찰받기 위해 친분이 있는 주변 대리점들과 전화와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사전에 정보를 주고받으며 담합을 모의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저가 출혈 경쟁하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죠.


아래는 실제 이들 대리점 사장들이 나눈 전화 내용입니다. 한 사장이 한 학교 교복 입찰을 앞두고 투찰 가격을 공유하면서 상대방더러 한 발짝 양보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학교 입찰 때는 자신이 기회를 양보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담합은 소리 없이 진행됐고, 이 학교 학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담합 가격에 교복을 구매해야 했습니다. 정확히는 무상 교복이니, 결국 세금으로 비싼 교복 값을 치른 겁니다. 이렇게 담합한 12개 대리점은 공정위에 뒤늦게 덜미를 잡혀 시정 명령과 경고를 받았고, 담합 정도가 심한 2곳은 과징금 총 700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들 대리점 업체 명단은 당시 공정위 보도자료에 게재돼 있습니다.

문제는 담합이 적발된 게 불과 작년 일인데, 이듬해 서울 경기 지역 학교들의 교복 납품 업체로 또다시 선정됐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작년 공정위 조사가 끝난 뒤 교육청은 이들 업체들이 앞으로 일정 기간 교복 입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징계 절차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그 절차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작년 12월쯤에야 완료됐습니다. 어떤 행정 제재를 내리려면 업체 해명도 듣고 제재 수위를 논의해야 하는 절차들이 온전하게 이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이들 업체들은 서둘러 다음 해 학교 교복 선정 입찰에 참여했고, 제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제재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틈을 타 발 빠르게 움직인 업체들이 올해 또다시 교복 공급 업체가 돼서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교복을 팔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그럼 이제 뒤늦게라도 제재가 내려졌으니까, 내년에는 이 업체들이 안 보일까요? 또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입찰에 참여할 수 없는 제재 기간이 대부분 5달, 길게는 6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제재 시작일이 올해 1월 1일부터이니 올해 5월 말이나 6월 말이면 제제가 모두 풀리게 돼있습니다. 교복은 1년 주기의 한 철 장사입니다. 교복 선정 절차를 보면 각 학교들이 자체 교복 선정 위원회를 꾸린 뒤 매해 여름이나 가을에 입찰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입찰 제재가 다 풀리고 난 뒤입니다. 사실상 담합 업체들의 영업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게 됩니다. 내년 교복 납품 업체 명단에도 또다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죠.


저는 담합한 교복 업체들에 내려진 몇 달짜리 제재가 사실상 효과 없는 거 아니냐고 경기도교육청에 문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경기도교육청 담당자는 "교복 업체들이 자영업자들이라서 제재가 몇 달짜리라도 가혹한 측면이 있다. 사장님들이 와서 눈물로 호소하기도 한다"라며 외려 업체들을 두둔했습니다. 그간 코로나로 자영업자들이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런 제재 기간을 좀 깎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안에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교복 가격을 담합하고 적발이 돼도 결국, 솜방망이 처분만 내려지는 현실. '무상교복' 사업 아래 암암리에 진행되는 업체들 담합은 명백히 세금을 갉아먹는 한 부정행위입니다. 그런데도 한 술 더 떠서 담합한 업체들이 자영업자들이니 좀 봐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경기도교육청의 온정적인 태도는 오히려 담합 세력을 더욱 키우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됩니다.

임태우 기자eigh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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