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곳도 없는데…" 빈병에 짓눌린 동네슈퍼의 비명

이지원 기자 2023. 2. 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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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용기 보증금 제도의 명암
제도 수혜는 제조사 몫인데
빈병 수거 의무는 소매점 몫
7년간 소매점 취급수수료 2원 올라
시스템 만들어야 할 환경부 뭐하나
빈병 재사용률은 90%를 훌쩍 넘는다. 그에 따른 수혜는 제조사의 몫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소비자가 빈병을 소매점에 반환하면, 도매상이 이를 수거해 제조사에 전달한다. 제조사는 수거된 빈병을 선별·세척해 재사용한다. 소주병과 맥주병은 평균 8~10번 재사용돼 친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이다. 1985년 도입한 '빈용기 보증금 제도'의 골자다.

# 하지만 이 제도에서 발생하는 수혜 대부분은 제조사가 누린다. 소비자로부터 돌려받은 숱한 빈병을 보관하고 도매상에게 넘기는 수고는 '소매점'의 몫이다. 이 불합리한 제도, 이젠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

"동네슈퍼에서 빈병을 반환하려고 하는데 수거 날짜가 아니라면서 거부하더라." "편의점 문 앞에 빈병 수거 시간이 붙어있던데, 시간 제한을 두는 건 불법 아닌가." 소주·맥주 등 빈병 반환을 거부하는 소매점 신고 건수가 지난 5년간(2018~2022년) 3453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주환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빈병 반환 거부 신고 건수는 2018년 278건에서 지난해 967건으로 3.5배가량 증가했다. 소매점이 '반환 자체를 거부'한 경우는 2113건, '반환 요일이나 시간을 지정'한 경우는 1074건이었다. 빈병 반환을 거부한 소매점은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소주·맥주병은 '빈용기 보증금 제도(자원의절약과재활용촉진에관한법률)' 대상이어서다. 소비자는 제품을 구매할 때 가격에 포함된 보증금(소주병 400mL 미만 100원·맥주병 400mL 이상 130원)을 지불하기 때문에 주류를 판매하는 도·소매점(대형마트·슈퍼마켓·편의점 등) 어디서든 빈병을 반환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 빈병 반환 거부는 엄연한 불법 행위에 해당한다는 거다.

하지만 소매점들이 법까지 어겨가면서 빈병 반환을 거부하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소비자가 가져온 빈병을 소매점이 받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다. 빈병을 받아 담배꽁초 등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깨지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다음 박스에 담아 개수를 세고, 보증금을 소비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박스를 보관 장소에 옮겨 도매상이 수거해갈 때까지 보관해야 한다. 매장이 좁아 빈병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소매점주로선 난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바쁜 시간대에 빈병 반환 손님이 몰리면 업무가 마비되고, 보관 중 병이 깨지기라도 하면 되돌려준 보증금은 고스란히 손실이 된다.

서울 관악구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박경은(56)씨는 "하루에도 400~500병의 빈병이 들어오는데 창고에 쌓아둘 공간이 없다"면서 "동네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빈병을 거부할 수도 없어 정해진 요일에만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지점에선 의문이 하나 있다. 왜 빈병을 돌려받는 일은 소매점만 하느냐다. 제조사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걸까. 답을 하나씩 찾아가보자.

■ 제조사 뭐하나 = 빈용기 보증금 제도가 처음 도입된 건 1985년이다. 하지만 20년 넘게 빈병 보증금이 소주병 40원, 맥주병 50원에 머물러 있다 보니 반환율이 저조했다. 그래서 환경부는 2017년 빈병 보증금을 소주병 100원, 맥주병 130원으로 인상했다. 버려지는 빈병의 반환율을 높여 재사용 횟수를 늘리겠다는 취지에서였다.

빈병 재사용 횟수가 늘어날수록 가장 큰 이익을 누리는 건 주류 제조사들이다. 환경부는 빈병 보증금을 인상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소주병의 제조원가는 143원가량인데 빈병을 8회 재사용하면 원가가 64원으로 떨어진다. 재사용 횟수가 더 늘어날수록 추가적인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 물론 제조사도 수거된 빈병을 선별·세척·검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새 병을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거다.

이처럼 제도에서 발생하는 수혜는 제조사가 누리고, '돌려받는 수고'는 소매점의 몫이라는 게 문제다. 물론 제조사가 소매점에 일정 금액을 지급하긴 한다. 취급수수료인데, 제조사는 도매점과 소매점에 나눠 지급한다. 소주병의 취급수수료는 32원(이하 병당)으로 도매점 20원, 소매점 12원이다. 맥주병의 취급수수료는 36원이다. 도매점과 소매점에 각각 23원, 13원 지급한다.

문제는 취급수수료가 턱없이 적다는 점이다. 소주든 맥주든 빈병 1000개를 처리해봤자 소매점에 떨어지는 건 1만원 남짓이다. 빈병 반환에 별도의 인력과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소매점으로선 울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다.

제조사 역시 소매점의 고충을 알고 있는 듯하다. 2016년 이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 제조사와 도매·소매업계는 취급수수료 인상안에 합의했다. 취급수수료는 주류 제조사(하이트진로·오비맥주·롯데칠성음료 등)와 도매상 대표(전국종합주류도매업중앙회), 소매상 대표(한국체인사업협동조합)가 협의해 결정한다.

[사진 | 연합뉴스, 자료 | 자원순환보증금관리센터] 

당시 환경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엔 이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제조사는 2018년 1월 1일부터 매년 전년도 빈병 재사용 증가로 발생한 편익을 산출하고, 그 편익의 40%를 도매업자에게, 60%를 소매업자에게 당해 연도에 지급한다." 이에 따르면 빈병 재사용률이 85%(2015년 12월 기준)에서 95%로 높아질 경우 제조사는 취급수수료를 10.3원(도매 4.1원, 소매 6.2원) 더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환경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소주병 재사용률은 98%, 맥주병 재사용률은 99%에 달한다. 당초 목표치(95%)를 뛰어넘는 성과를 냈지만, 제조사가 소매점에 지급하는 취급수수료는 2016년(소주병 10원, 맥주병 11원) 대비 현재 단 2원 올랐다. 홍춘호 한국마트협회 정책이사는 "취급수수료 결정은 제조사가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다"면서 "제도에 따른 부담이 모두 소매점에 전가되지 않도록 제조사의 역할과 책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 환경부 뭐하나 = 숙제는 또 있다. 빈병을 둘 곳이 없는 소매점을 위해 '인프라'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부의 플랜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빈용기 보증금 제도 안착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 지원 사업은 크게 세가지다. 'P박스(주류 전용 플라스틱박스)' '반환수집소' '무인회수기' 등이다.

모두 소비자가 지불하고 환급받지 않은 '미반환 보증금'으로 운영하는 사업이다. 연간 미반환 보증금은 2018년 104억원, 2019년 127억원, 2020년 116억원, 2021년 96억원 등으로 누적 잔액은 552억원(2021년말 기준)에 이른다. 제법 많은 예산을 확보했다는 건데, 환경부는 세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P박스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소매점이 숱하다. 점주 박경은씨는 "P박스가 부족해 종이 박스에 빈병을 보관한다"면서 "박스 바닥이 찢어져 빈병이 깨진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두번째 지원 사업인 '반환수집소'도 태부족이다. 빈병을 전용으로 수거하는 카라반 형태의 반환수집소는 전국에 30개에 불과하다. 서울의 경우 송파구에 단 한곳 설치돼 있다. '무인회수기'도 마찬가지다. 전국 107곳에 147개의 무인회수기가 설치돼 있는데 연간 14억개(이하 가정용 기준)에 달하는 빈병을 처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대부분 대형마트 안에 설치돼 있어 소비자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다.

동네슈퍼 점주들은
[사진 | 뉴시스] 

홍춘호 정책이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많은 소비자가 대형마트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슈퍼에 빈병을 반납한다. 이 때문에 동네슈퍼의 경우 주류 판매량보다 빈병 반환량이 10~20%가량 많다. 빈병 쏠림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선 수거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거나, 동네슈퍼에서 요일과 시간을 지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유연하게 운영해야 한다."

실제로 무인회수기나 반환수집소를 통해 수거하는 빈병은 전체의 3.3%가량에 불과하다. 대부분 소매점으로 몰린다는 거다. 백나윤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제도에 따른 모든 역할을 소상공인(소매점)에게 지우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처사"라면서 "환경부가 나서서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빈병'은 '공공재'라는 인식이 퍼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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