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스승 아내 넘본 제자의 결말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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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와 반 다이크
때로는 스승과 제자, 때로는 라이벌
미묘했던 그들의 관계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화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습니다. 10년 전 조수로 채용했던 앳된 얼굴의 소년. 처음 봤을 때부터 소년의 그림 실력은 이미 웬만한 중견 화가를 압도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소년을 만나자마자 화가는 직감했더랍니다. ‘이 녀석은 천재다.’ 화가에겐 소년의 실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보다도, 이 천재를 곁에 두고 직접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조수가 된 소년. 그림 기술에서부터 고객을 대하는 매너, 교양까지 화가의 모든 걸 스펀지처럼 흡수했습니다. 덕분에 조수는 그림 기술로만 따지면 화가와 비슷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화가는 조수가 기특하기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최고의 제자는 이 녀석’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조수는 선을 넘었습니다. ‘화가가 해외 출장으로 바쁜 사이, 조수가 화가의 아내를 노리고 있다.’ 어느 날 이런 소문이 화가의 귀에 들어온 겁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며칠 전 조수가 아내를 바라보던 눈빛.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끈적한 시선을 화가는 보고 말았습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입니다. 화가는 조수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너, 유학 좀 갔다 와야겠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17세기의 두 거장, 피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와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의 미묘한 관계를 다룹니다.
두 천재의 만남
유럽의 주요 미술관치고 루벤스 그림이 한 점도 없는 곳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루벤스는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생전 그가 남긴 유화는 3000점 이상. 아무리 루벤스가 부지런하고 손이 빨라도, 이만한 양의 그림을 혼자 그리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런 다작(多作)은 루벤스가 ‘공장식 아틀리에’를 운영한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서양 화가들은 혼자 그림을 그리지 않고 제자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루벤스는 이런 시스템을 공장식으로 확대 개편했습니다. 제자와 조수들을 여럿 받아 팀을 짰고, 팀장을 지명하는 등 분업 체계를 효율적으로 정비해 그림을 대량 생산한 거지요. 루벤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을 다 그릴 때도 있었지만, 마무리만 하거나 감독만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루벤스의 손이 많이 간 작품일수록 값이 비쌌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가동하려면 많은 인재가 필요했습니다. 특히 작품 완성에 책임을 지는 팀장급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인재를 찾던 루벤스의 레이더에 같은 도시(벨기에 앤트워프)에 살던 반 다이크가 걸려들었습니다. 반 다이크는 10대 때부터 ‘그림 천재’로 유명했고, 불과 16세 때 조수 두 명을 거느리고 독립 공방을 차렸던 인물. “우리 아틀리에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반 다이크도 루벤스의 이런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루벤스는 ‘그림의 신’이었으니까요.
19세 때인 1618년,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밑으로 들어갑니다. 반 다이크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루벤스는 생각했습니다. ‘이 녀석은 진짜 천재다.’ 물론 루벤스 자신도 역사에 남을 천재였습니다. 하지만 루벤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을 갈고닦아 빛나게 된 ‘노력형 천재’. 반면 반 다이크는 원석부터 빛나는 ‘타고난 천재’였지요.
이 천재는 거장이 평생 쌓은 노하우를 순식간에 배웠습니다. 대작을 그리기 전 펜으로 스케치하는 습관부터 시작해 루벤스의 모든 비법을 배웠고,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반 다이크의 작품을 루벤스 그림으로 착각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러면서도 반 다이크는 항상 스승을 제칠 궁리를 했습니다. ‘루벤스의 조수’가 아니라 ‘반 다이크’로 유명해지고 싶었던 거지요. 이를 위해 반 다이크는 루벤스와 차별화를 꾀했습니다. 세속적이고 귀족적이었던 루벤스는 자신처럼 화려하고 관능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반면 반 다이크는 사막에서 고행하는 비쩍 마른 노인, 성 히에로니무스의 그림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림에 조선인을 등장시키는 등 국제적인 소재를 즐겨 그렸던 루벤스와 달리 반 다이크는 앤트워프 사람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목자들의 경배’에 나오는 인물들의 얼굴은 네덜란드 남부의 실존 인물들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반 다이크가 이탈리아로 떠난 이유
기록에 따르면 반 다이크는 1621년 갑자기 앤트워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습니다. 확실한 이유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201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존 하비 박사는 “반 다이크가 루벤스의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쫓겨났다”는 해석을 내놨습니다. 그는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내셔널갤러리는 이 초상화에 대해 ‘반 다이크가 루벤스에게 보낸 선물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루벤스가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의 아내 초상화를 몰래 그려서 자기가 갖고 있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이 여성의 장난기 넘치는 표정은 루벤스의 그림 어디에도 나온 적 없는 모습입니다. 뒤쪽 미네르바 동상도 일반적인 미네르바 동상과 모양이 야릇하게 다르고요.”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추측할 뿐이지만, 어찌 됐든 반 다이크가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에서 미술 공부를 제대로 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가 르네상스 거장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아 특유의 초상화 화풍을 확립한 것도 이때입니다.
6년이 지난 1627년, 반 다이크는 다시 앤트워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 귀족의 초상화를 수주하는 등 루벤스가 독점하던 일감을 미친 듯이 따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루벤스는 뜻밖에도 껄껄 웃어넘겼습니다. “내 제자가 초상화를 참 잘 그리는구먼. 아주 기가 막혀. 전업 초상화가를 하면 대단하겠어.”
루벤스의 말대로 반 다이크는 초상화로 전 유럽에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던 중 영국 왕 찰스 1세의 관심을 끌게 됐고, 1632년 영국으로 건너가 궁정 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많은 명작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미술 변방’ 취급을 받던 영국 미술은 반 다이크 덕분에 크게 발전했고, 훗날 영국이 ‘미술 강국’으로 떠오르는 발판도 이때 마련됐습니다. 그렇게 반 다이크는 불과 30대의 나이에 ‘루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이란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반 다이크, 루벤스 넘지 못한 이유는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는 주저 없이 바로크 미술의 일인자로 루벤스를 꼽습니다. 반 다이크가 1등이라는 목소리는 거의 없습니다. 세 가지 이유가 이들의 순위를 갈랐습니다.
①건강. 1640년 루벤스가 세상을 떠나자 반 다이크는 ‘그림 황제’로 등극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반 다이크는 루벤스가 죽은 지 불과 1년 만인 1641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나이 불과 42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루벤스가 63세까지 산 것과 대조적입니다. 만약 반 다이크가 루벤스만큼 살았다면, 순위는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예술가들은 보통 나이가 들수록 성숙하니까요. 하지만 반 다이크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덕분에 그의 ‘후기 작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건강이 최고입니다.
②디테일. 반 다이크도 루벤스처럼 공장식 아틀리에를 운영했습니다. 영국 왕실은 물론이고 전 유럽 귀족들의 초상화 주문이 몰려드는 바람에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물량을 소화할 수 없었거든요. 대부분 그림에서 반 다이크는 가장 중요한 얼굴 부분과 그림의 전체적인 마무리를 담당했고, 인물의 몸이나 배경은 제자들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반 다이크의 ‘디테일’은 그림의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체크했던 루벤스에게 못 미쳤습니다. 그가 1638년 찰스 1세의 초상화에서 저지른 실수를 보시죠.
바닥에 떨어진 건틀릿(팔목이 긴 장갑)을 자세히 보면, 손가락의 방향으로 미뤄봤을 때 오른손 장갑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에 왼손 장갑은 없고 오른손 장갑만 두 개인 거죠. 이 작품을 루벤스가 저승에서 봤다면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사람 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지?”
③인성. 반 다이크는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자기애와 과시욕이 강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쉽게 말해 잘난 척이 심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루벤스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만능 경영자이자 엔터테이너였습니다. 친화력이 높은 성격, 세련된 행동거지, 외국어 실력과 풍부한 교양 덕분에 금세 고객들을 사로잡곤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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