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그림병풍, 아름다운 계절에 영원히 머물다

한겨레 2023. 2. 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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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선, 병풍의 나라 2’
장승업, 홍백매도 10폭병풍, 19세기 후반,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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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끝난 줄 알았는데, 뜻밖에 다시 시작되고 이어지는 것들에 놀랄 때가 있다. 얼마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는 5년 전 열렸던 기획전이 후속편으로 돌아왔다. 조선 시대부터 근대기까지 제작된 우리 옛 병풍들을 소개하는 ‘조선, 병풍의 나라 2’(4월30일까지)다.

전시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만나는 것은 전통 화조도를 풀어 헤친 현대 작가 이이남의 미디어 병풍이다. 꽃과 새, 나뭇가지가 모조리 화면에서 휩쓸려 나갔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이, 관람객은 잠시 텅 빈 병풍을 마주하게 된다. 병풍은 병풍인데 그림이 없어지니 영 처음 보는 물건 같다. 그 낯선 느낌이 이 전시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가만히 귀띔해준다. “속편 주인공은, 그림이래.”

이이남, 전시 전경. 신지은 제공

병풍 속 그림에 초점

이 전시는 병풍의 쓰임새나 모양보다는 그 안의 그림에 초점을 맞추었다. 거의 대부분의 병풍이 편평하게 펼쳐져, 화폭을 지그재그로 접을 때 생기는 공간감이나 입체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이 관람객 눈높이에 오도록, 높낮이를 맞추어 설치한 것도 눈에 띈다. 회화 작품으로서 전시보다는 그 안의 그림에 초점을 맞춘 전시라는 것이 한번 더 강조되는 지점이다.

전시실에 설치된 조립식 틀은 진열장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액자에 가깝다. 유리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작품과 관람객의 거리는 반 뼘 남짓에 불과하다. 글자 그대로 코앞에서 그림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멀찍이서는 발견하지 못했을 그림 속 디테일이나 흐릿한 흔적들까지 맨눈으로 관찰하는 즐거움이 50여점의 작품들을 보는 내내 이어진다. 조명 연출이 뛰어나기로 명성이 높은 미술관답게, 어디선가 보았던 작품들도 여기서는 새로운 윤곽과 빛깔로 눈에 들어와 안긴다.

조선 시대에 그림 병풍은 궁궐과 민간에서 두루 사랑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어디서 쓰인 병풍이냐에 따라 그림 속 어법과 미감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풍성하면서도 섬세하게 만든 궁궐용 병풍은, 위엄 가득했을 원래 자리를 상상하게 한다. 반면 각양각색의 민간 병풍은 그 앞에 앉아 있었을 주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십장생’으로 대표되는 장생(長生)의 상징을 그린 병풍들은 이런 차이를 비교해보기 좋은 작품들이다.

형형색색의 환상적인 색채가 눈을 시원하게 적시는 십장생도 창호나 일월오봉도 병풍, 일월반도도 병풍 속 상징들은 궁궐 사람들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이번 전시에서 새로 공개된 채용신의 장생도 병풍 속 풍경은 속세 한가운데의 낙원 같아 흥미롭다. 사슴에 학, 공작, 원숭이, 앵무새가 모여든 우람한 소나무 뒤로 석등과 야자수, 파초가 보인다. 1921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마치 진귀한 동식물을 모아 꾸민 근대 시기 부잣집 정원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어디서 누가 썼던 물건일까를 짐작하는 사이, 머릿속에 어렴풋하던 조선 시대 그림의 아름다움은 한결 또렷한 입체가 되어간다.

장승업, 홍백매도 10폭병풍(세부), 19세기 후반,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지지 않는 꽃, 병풍 속 봄

한편 화가들의 예술성이 한껏 발휘된 그림들도 만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장승업이 그린 <홍백매도 10폭병풍>은 종이 위로 쓱쓱 붓을 움직여 나갔을 화가의 자신만만한 뒷모습이 보이는 듯한 작품이다. 힘차게 뻗어난 매실나무 두 그루에서 나무 우듬지와 둥치는 제하고, 가장 왕성하게 우거진 한가운데를 성큼 비추었다. 큼직한 옹이가 팬 줄기에서 자라나온 굵은 가지와 붉고 흰 매화꽃에서 폭발하는 생명력의 기세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만발한 꽃 사이로 비쳐드는 늦겨울 햇살은 얼마나 고울까. 앞장서 온 봄 향기를 맡는 듯 흥이 저절로 마음을 채운다.

한편 순천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금니사군자화훼 10폭병풍>은 조선의 마지막 궁중 화가로 꼽히는 안중식의 1901년 작품이다. 까만 비단에 금니(金泥)로 열 가지 꽃과 나무를 그렸다. 금니는 풀에 금가루를 섞은 물감이라 붓질을 매끄럽게 하기 어려운데, 안중식은 마치 먹물 묻은 붓을 놀리듯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필치로 식물을 그려냈다. 각각의 폭에는 식물을 그리고 관련된 시를 썼는데, 목련을 그린 폭에 곁든 시 구절이 특히 아름답다. “그림으로 보는 것이 심어서 보는 것보다 나은 것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네.”

안중식, 금니사군자화훼 10폭병풍, 1901년, 순천대학교박물관 소장. 신지은 제공

사나운 추위에도 나날이 꽃눈에 살이 오르는 목련나무를 지나치는 늦겨울, 목련이 툭툭 꽃잎을 떨굴 어느 날이 벌써부터 아쉬운 것은 입춘(2월4일)이라설지도 모르겠다. 환하게 봄을 밝히는 그 아름다운 꽃과 헤어지는 서글픈 마음을 화가와 나누고 나면, 사계절의 꽃과 나무를 차곡차곡 담아낸 그림 병풍 속 세계가 한결 가깝게 느껴진다. 지지 않는 꽃, 끝나지 않는 계절, 아름다운 시간과 영원히 머물고픈 사람들의 마음이 병풍 폭마다 스며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병풍 그림 속에 담긴 마음들에 한발 한발 다가가다 전시 말미에 이르면, 호화로운 책가도 한 점이 눈길을 끈다. 19세기에 그려진 <호피장막도 8폭병풍>이다. 표범 가죽으로 만든 커튼을 살짝 들어 올리면 펼쳐지는 것은 어느 맥시멀리스트의 서재이다. 고급 문구류와 장난감, 비단 바른 책갑으로 고이고이 감싼 원서들 사이에 값비싼 수입 골동품들을 무심하게 툭툭 배치했다. 서안 위에 책을 펼쳐둔 채 안경을 벗어둔 것을 보니, 서재 주인은 책을 읽다 잠시 자릴 비운 모양이다.

호피장막도 8폭병풍, 19세기,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이 책은 정약용의 시집으로, 그림 속에 펼쳐진 쪽에는 자연 속에서 친구와 맛있는 술과 생선 안주를 나누며 안락함을 즐긴다는 시가 적혀 있다. 그림 속의 풍경은 조선 후기 선비들에겐 그야말로 완벽한 ‘꿈의 서재’였을 텐데, 정작 이 서재의 주인은 속세를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삶을 갈망한다.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은, 지금 내게 없는 것.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 삶의 역설인지도 모른다. 꿈속의 꿈 같은 겹겹의 바람들이 담긴 그림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갈망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 가장 기다리는 것은, 역시 아직 오지 않은 봄이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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