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케이드 된 나무술통…알고보면 ‘이 맛’내는 비결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2. 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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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주제가 ‘민중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 가사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Beyond the barricade is there a world you long to see? Then join in the fight that will give you the right to be free!(바리케이드 너머에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 있나? 그러면 자유와 권리를 줄 투쟁에 동참하라!) *관련 영상

시민의 저항 의식을 고취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부분인데요. 레미제라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바리케이드(barricade)입니다.

바리케이드는 프랑스 혁명에서 역사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시민들이 정부군의 전진을 늦추기 위해 여러 가구나 물건으로 임시 설치한 장애물이었죠. 그런데 그 전략적 중요성 덕분에 사장되지 않고 현대에는 아예 임시 장애물을 칭하는 대명사가 됐습니다.

바리케이드라는 이름의 유래가 재밌는데요. 프랑스 혁명 당시 시민들이 바리끄(barrique)라는 와인을 숙성하던 오크통에 모래 등을 넣고 쌓아 엄폐물로 사용한 것에서 시작했답니다. 누가 와인의 나라 아니랄까봐, 혁명의 역사에서도 와인이 빠지지 않는군요.

오늘은 이 오크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현대의 레드 와인 중에는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는 녀석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와인 양조의 핵심 요소인데다, 와린이들이 가장 쉽고 친근하게 느끼는 아로마기도 하거든요.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시민들이 가구 등 다양한 물건으로 길목에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농성하고 있다. /레미제라블 캡쳐
와인 양조 요소의 ‘원픽’, 오크통 숙성
오크통 숙성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원재료 ‘포도’를 제외한다면, 와인 양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와인들은 존재하지 않았을테고, 우리는 완전히 다른 와인을 마시고 있을 겁니다.

갓 수확돼 즙으로 짜여진 와인은 오크통 속에서 일정기간 머무르면서 산소와 만나 조금씩 산화되는 시간을 거치는데, 이를 오크통 숙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크게 와인에 두 가지 변수가 발생합니다.

첫번째는 증발작용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통이다보니 미세한 구멍을 통해 와인의 수분이 일정부분(보통 10% 내외로 추산) 날라가게 되고, 반대로 공기가 나무결을 타고 와인과 접촉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발효된 과일즙 수준이던 와인의 타닌이 부드러워지고, 혀를 찌르는듯한 산도 역시 누그러집니다.

두번째는 와인이 오크통 속에 머무는 동안 특유의 향과 풍미를 받아들여 깊이와 여운, 복합성, 강도 등이 생깁니다. 오크통을 만들 때 열을 가해 나무 판자를 둥글게 구부리는데요. 이런 작업을 토스팅(toasting)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오크나무는 바닐린(vanillin) 성분을 발산하게 됩니다. 일부를 태웠으니 당연히 스모키한 느낌도 살아나게 되고요.

보르도나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자란 까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품종으로 잘 양조된 레드와인을 즐겨드신다면, 그 향이나 맛에서 바닐라, 삼나무, 커피, 초콜릿, 스모키(그을리거나 탄 듯한 풍미) 등의 뉘앙스을 느껴봤을 겁니다. 바로 이런 특징들이 오크통 숙성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이 지역들은 오크를 많이, 잘 쓰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죠.

토스팅 중인 오크통. 안쪽을 얼마나 굽느냐에 따라 와인에 영향을 주는 풍미가 달라진다. /출처 미상
원산지, 크기, 사용횟수 등 무궁무진한 변수
특히 오크통 숙성은 양조자들이 자신의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장 많이 활용하는 요소입니다. 오크통의 원재료가 되는 오크의 산지에서부터, 크기, 굽기 정도, 사용횟수 등이 전부 양조자가 활용할 수 있는 옵션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크나무는 크게 프렌치 오크로 대표되는 유럽 오크와 미국의 화이트 오크로 나뉩니다. 나무가 자라는 기후와 환경에 따라 특성이 달라지는데, 와인 양조에 미치는 영향도 꽤 커서 비단 소믈리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미국의 화이트 오크는 유럽 오크에 비해 더 강한 맛과 향을 담아내 줍니다. 특유의 달큰한 뉘앙스로 와인은 물론 위스키 생산을 위해서도 많이 쓰입니다. 반면 신대륙에 비해 가혹한 생장 환경에서 자란 유럽 오크는 재질이 훨씬 더 조밀합니다. 그만큼 오크 세포에서 향이 서서히 우러나오고, 섬세하고 다양한 풍미를 와인에 더해줍니다.

와인을 숙성하는 오크통의 크기에도 와인 양조자의 의도가 숨겨져있습니다. 작게는 225ℓ짜리 바리끄부터 크게는 2000ℓ 이상 들어가는 푸드흐(foudres)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는데요. 통이 작을수록 와인의 부피당 접촉면이 크기 때문에, 어느 지역의 오크통을 어느 정도 크기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천차만별로 갈리게 됩니다.

새 오크통와 사용한 오크통(used oak)를 나누는 점도 특이합니다. 오크통 가격이 개당 수백만원에 달할 정도로 비싼데다, 새 오크통이 사용한 오크통보다 오크 특유 풍미를 강하게 발현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극도로 섬세한 양조자들은 일부러 특정 와인을 숙성하는 데에 이미 사용했던 오크통을 쓰기도 합니다. 실타래처럼 복잡미묘하게 엉켜있는 향과 맛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이죠.

위스키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실텐데요. 일부 섬세한 싱글몰트 위스키의 경우, 쉐리캐스크, 버번캐스크, 꼬냑캐스크 등 캐스크(오크통의 종류 중 하나)에 어떤 술을 담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와인 숙성 오크통 중 가장 큰 사이즈를 자랑하는 푸드흐. 국가와 지역은 물론 심지어 와이너리마다 크기가 제각각이다. /출처=domaines-schlumberger
오크통, 흰 도화지 위에 그림 그리는 물감
앞에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레드와인이 오크통 숙성을 거치는 편입니다만, 분명히 오크통 숙성을 거치지 않는 녀석들도 존재합니다. 화이트 와인의 경우 오크통 숙성을 통해 오히려 화려하고 다채로운 아로마를 해치는 까닭에 지양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뉴질랜드 소비뇽블랑입니다. 소비뇽블랑 품종은 특유의 상큼하고 푸릇푸릇한 풍미가 매력적인데요. 뉴질랜드는 서늘하고 깨끗한 기후 덕분에 소비뇽블랑의 주산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소비뇽블랑을 양조할 때 오로지 스테인레스통에서만 숙성하죠. 오크의 풍미가 가볍고 하늘거리는 소비뇽블랑의 아로마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만화 ‘신의 물방울’ 덕분에 와린이들에게도 굴과 환상 궁합으로 잘 알려진 샤블리도 오크 숙성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화려한 하얀 꽃밭을 거니는듯한 느낌과 특유의 떼루아(키메리지안·과거 해안이었던 토양)에서 발현하는 미네랄리티가 아름다운데, 이런 느낌들이 오크 숙성을 통해 사라져 버리거든요.

반면 부르고뉴 블랑(Bourgogne Blanc)은 오크통 숙성을 극도로 섬세하게 사용해 전세계인이 찾는 베스트셀러입니다. 부르고뉴 지역에서 샤도네 품종으로 빚어내는 고급 화이트 와인으로 꾸안꾸(꾸민듯 안꾸민듯) 스타일이 무척 우아하고 아름다운 와인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현직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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