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무 앞에 고요히 서본 적이 있는가?

한겨레 입력 2023. 2. 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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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픽사베이

◆ 씨앗 명상 : 씨앗이 품고 있는 신비①

나무를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 어느 나무 앞에 고요히 서본 적이 있는가?

마치 마음을 사로잡는 한 곡의 음악을 듣듯, 혹은 한 권의 깊이 있는 책을 읽듯, 더 나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존재의 마음을 살피듯. 마주할 나무가 속리산 입구에 사는 정이품송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존재가 아니어도 된다. 심지어 그 나무의 이름을 몰라도 괜찮다.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가로수여도 좋고,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에 눈에 들어오는 나무여도 좋다. 산책이나 여행 중에 잠시 멈춰 선 자리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나무여도 상관없다. 장소 또한 특별할 필요는 없다. 절집이든 궁궐이든 집 마당이든, 일터의 화단이든 가까운 공원이든, 혹은 마음먹고 떠난 어느 한적한 야영장이든 다 괜찮다. 내 눈길을 끈 그 나무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나도 다만 가만히 서서 내 앞에 서 있는 그 나무를 마주하는 경험을 갖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시선을 옮기는 것이 좋다. 그 나무가 땅에 붙박고 서 있는 뿌리 근처의 둥치로부터 시작해 줄기로, 줄기에서 갈래를 치며 옆으로 또 하늘로 뻗은 가지, 그리고 천천히 다른 가지들로, 그곳에 돋아 있는 푸른 이파리로(가을이라면 단풍 든 잎들, 겨울이라면 나목(裸木) 상태로 서 있는 나뭇가지와 그 가지가 품고 있는 잎눈과 꽃눈과 맨몸 전체로), 이윽고 가장 높은 자리의 가지들 끝이 하늘과 만나 이루는 우듬지에 이르기까지. 다정한 침묵 속에서 그 나무를 가만가만 살펴보는 것이다. 여태 그런 적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꼭 시도해보길 권한다. 시도할 때는 마치 어린아이가 팔랑대는 나비나 꿈틀대는 지렁이에게 온 정신을 맡기듯, 그렇게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깨어있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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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들이 꽃을 잔뜩 피워놓고/ 열매가 생기기를/ 우두커니 서서 기다린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벌이 잉잉거릴 때/ 꽃들은 먼발치서 달려오는 벌을 맞으러/ 하나씩 문을 열 것이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마침 파고든 벌을 힘껏 껴안는/ 이 팽팽함!// 배나무나 벚나무 상공(上空)에서/ 새들은 땅 위에서 환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잠시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을 잊을 것이다.(황동규, ‘꽃 2’전문. 시집 <삶을 살아낸다는 건>에서 인용)

시인은 꽃을 새의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꽃이 피는 광경을 ‘땅 위에서 환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 환한 구름은 나무와 꽃과 벌들의 능동적 역동이 빚어내는 거란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한 그루 나무를 자세히, 깨어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세로 나무를 마주해보는 일은 돈 없이도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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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매와 씨앗

나 또한 뿌리로부터 우듬지까지, 나무가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느끼는 경험을 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나무가 이룬 성취, 바로 열매와 씨앗을 살피는 것을 각별히 좋아한다. 숲에 머물러 살기 시작한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열매와 씨앗에 눈과 마음을 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열매와 씨앗을 대하는 태도는 차라리 명상 같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명상 같은 대면을 통해 나는 씨앗이 상징하고 있는 삶의 근원적 진실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갖게 되었다. 씨앗에 관한 나의 통찰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열매와 씨앗’이라는 두 가지 용어의 차이에 대해 잠시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식 혹은 과학 세계와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다.

알다시피 우리가 흔히 먹는 사과는 열매다. 사과의 씨앗은 사과를 절반으로 잘랐을 때 그 중심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사과나무 열매는 우리가 먹는 과육(果肉·열매에서 씨앗을 둘러싸고 있는 살 부분)의 중심부에 제 씨앗을 숨겨두고 있다. 사과 씨는 거뭇하고 반질반질하며 단단한 씨껍질(種皮)을 가졌다. 크기는 과육의 부피 전체에 비해 턱없이 쪼끄마하다.(상대적으로 아주 커다란 아보카도의 씨를 떠올려 보라!) 이렇게 열매와 씨앗을 구분하는 일이 간단한데 왜 용어 정리가 필요할까? 식물학적 정의와 우리 대중의 오랜 정서적 표현 사이에서 빚어지는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르익은 가을날 길을 걷다가 은행나무 아래 땅바닥에서 구릿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銀杏)과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건 열매일까? 씨앗일까? 이 물음에 ‘열매지! 그 안에 은행알이라는 씨가 있는!!’이라고 대답한다면, 우리의 전통과 정서로는 맞는 구분이겠지만 과학의 기준에서는 틀린 답이 된다. 즉 은행을 사과처럼 열매와 씨로 구분하면 식물학적으로는 틀린 표현이 된다. 사과처럼 구분한다면 은행알 바깥의 물컹하고 독특한 냄새가 나는 노란색 부분은 과육이고, 그 안에 우윳빛의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은행알’ 부분을 씨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식물학은 그 전체를 합쳐서 씨앗이라고 부른다. 식물학적으로 은행에는 과육이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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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은 열매와 씨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씨앗(종자·seed)은 다음 세대, 즉 새로운 식물로 자랄 부분을 일컫는다. 열매(과실·fruit)는 씨앗을 포함하면서 과육과 그 껍질(果皮·rind)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기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식물학에서는 왜 은행을 열매가 아닌 씨앗이라고 부를까? 식물학에서 열매는 감이나 복숭아와 같이 ‘씨방이 발달·성숙하여 이루고 있는 결실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이 경우를 참열매라고 함.) 물론 사과나 배처럼 씨방 이외의 부분도 함께 자라서 열매가 되는 것도 있다.(이 경우는 헛열매라고 함.) 따라서 식물학적으로 열매라 부르려면 씨방이 성숙해서 맺는 결실이어야 하는데, 씨방은 속씨식물(피자식물)에만 있고 은행나무나 소나무 같은 겉씨식물에는 없다. 그래서 은행도, 비늘조각(鱗片) 하나하나에 씨앗을 품고 있는 솔방울도 모두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충북 괴산 여우숲.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 용어의 문제

꽃에 관한 정의도 그렇다. 식물학에서 ‘꽃’은 속씨식물의 생식기관을 일컫는 말이다. 소나무 같은 겉씨식물의 그것은 자성구화수(雌性球花穗), 웅성구화수(雄性球花穗) 같은 어려운 말로 지칭한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규배의 학술논문 <식물형태학에서 사용하는 종자식물의 생식구조에 관한 한글 용어의 분석>을 보라.) 이는 그야말로 식물학 세계만의 리그가 아닐 수 없는 구분이요, 말들이다. 나는 저렇게 고립된 용어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식물학을 포함한 근대 학문이 식민지 시절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일본의 전통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고스란히 포함하고 있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가 식민의 억압과 이식으로부터 벗어난 지 100여년이 가까워져 오는 데도 우리의 식물학은 혼란스럽고 어색한 용어들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체계적인 노력을 게을리 한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말이다.

적어도 꽃과 열매와 관련해서는, 이어질 나의 글은 식물학의 엄밀함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정서가 수천년 동안 공유해온 ‘꽃’과 ‘열매’ 그리고 ‘씨앗’이라는 말로도 전달하고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민들레의 경우 ‘홀씨’라고 부르는 대중적 용례를 거슬러 ‘민들레의 씨앗’으로 사용할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민들레의 씨앗을 ‘홀씨’라고 부르는데, 이건 유명한 노래의 가사가 대중에게 흩뿌린 명백히 잘못된, 그리고 혼란마저 줄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85년의 강변가요제에서 가수 박미경은 노래 <민들레 홀씨 되어>를 불렀고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가사의 일부를 보자.

“달빛 부서지는 강둑에 홀로 앉아 있네./ (중략)/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 되어/ 강바람 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

이후 지금까지 민들레의 씨앗을 ‘홀씨’로 부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마치 이것은 5월 즈음에 전국의 양지바른 산하에서 우윳빛 향기로운 꽃을 피우며 꿀벌을 부르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북미 원산의 그 나무를 ‘아카시아’로 잘못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카시아’라고 부르고 있는 그 나무의 바른 이름은 ‘아까시나무’이다.(진짜 아카시아나무가 궁금하다면 세종국립수목원의 ‘사계절전시온실’로 나들이를 해보라.) 표준국어대사전마저도 아카시아를 ‘아까시나무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로 승인했을 정도니 얼마나 큰 혼란인가. 그 혼란은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세대를 넘으며 불려온 박화목 작사·김공선 작곡의 동요 ‘과수원 길’이 끼친 영향이 지대할 것이다.

다시 홀씨로 돌아오자. 홀씨는 한자로는 포자(胞子)라고 쓴다. 고사리나 이끼 같은 식물이나, 곰팡이나 버섯 같은 균류 등 무성생식(無性生殖)을 하는 식물이 만드는 생식세포를 이르는 말이다. 민들레는 꽃을 피움으로써 유성생식(有性生殖)을 추구하는 식물이다. 따라서 민들레의 꽃이 맺은 성취를 부르는 말은 ‘홀씨’가 아니라 ‘씨앗’이어야 진짜 ‘홀씨’와 혼동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민들레 홀씨’라는 말은 이름이 친숙하고 어감이 좋을 수는 있으나, 명백히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숲과 대면하는 일에서는 혼란을 일으키는 잘못된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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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 명상

위와 같이 몇 가지 용어와 관련하여 비교적 상세히 정리하고 기술한 이유는 앞으로 이어갈 몇 가지 주제에서 해당 용어가 등장할 경우 조금 더 부드러운 이해를 돕고자 함이다. 이제 앞서 말한 열매와 씨앗을 마주하여 얻은 이야기를 해보자. 씨앗과 마주한 그 명상 같은 대면을 통해 얻은 사유를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다음번 글에 이음)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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