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감산을 감산이라 부르지 못한 이유

정재웅 입력 2023. 2.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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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인더스토리]삼성전자 "인위적 감산 없다"
저가 상황서 시장지배력 키우기 전략·버티기 자신감
전문가들, 자연적·기술적 감산 가능성 높아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워치인더스토리는 매주 토요일, 한 주간 있었던 기업들의 주요 이슈를 깊고, 쉽고, 재미있게 파헤쳐 보는 코너입니다. 인더스트리(산업)에 스토리(이야기)를 입혀 해당 이슈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과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자기 입으로는 말 못 하지"

기자 초년병 시절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를 출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을 전담하는 부처였던 만큼 거대 담론들이 오갔던 곳이었습니다. 초년병이니 돌아가는 상황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매일 쏟아지는 자료와 브리핑이 버겁기만 했습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을 글자였죠. 수화기 건너편의 담당 공무원이 쏟아내는 이야기 중에서 제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재경부에서는 매주 한 번씩 부총리가 직접 나와 경제정책에 대한 브리핑을 했습니다. 브리핑이 있는 날은 오전부터 정신이 없었습니다. 재경부 출입 기자 전부가 커다란 브리핑룸에 모여 앉아 부총리의 입에 집중했죠.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담긴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습니다. 물론 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요. 그저 오늘 구내식당 점심 메뉴가 무엇일지가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그날도 브리핑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선배 기자들이 모여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 환율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다들 걱정이 많았죠. 선배들은 그날 정부의 환율 방어 대책에 대한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브리핑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선배들은 작심한 듯 부총리에게 외환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의 입에 모든 시선이 집중됐습니다. 

하지만 부총리는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면밀히 시장을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은 없다. 시장 상황에 맡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배들도 부총리가 그런 답변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희한했습니다. 왜 더 부총리에게 달려들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한 선배가 그러더군요. "개입하지. 하지만 자기 입으로는 말 못 하지".

삼성전자도 어려웠다

제목으로 삼성전자를 뽑아 놓고 뜬금없이 환율 이야기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삼성전자의 실적 컨퍼런스콜을 보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작년 말부터 삼성전자의 반도체 감산 여부가 초유의 관심사였습니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전자제품의 수요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이 탓에 전자제품에 필수인 반도체 수요도 확 줄었습니다.

공급이 많고 수요가 줄어들면 가격은 떨어집니다. 현재 반도체 시장 상황이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조정이 필요합니다. 수요는 경기를 타는 만큼 조정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공급을 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SK하이닉스나 마이크론과 같은 반도체 업체들이 '감산'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수요를 늘릴 수 없으니 공급을 줄여 가격 하락을 막아보겠다는 겁니다.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주요 반도체 업체들의 감산 결정이 잇따르면서 시장과 업계의 시선은 삼성전자로 쏠렸습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입니다. 1등이 어떤 액션을 취하느냐에 따라 시장 상황은 변합니다. 뒤를 쫓는 업체들에게는 일종의 시그널이 됩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에 이미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시장과 업계가 이번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삼성전자의 감산 결정 발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은 지난 3분기보다 4분기의 상황이 더 악화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2700억원이었습니다. 전기 대비 94.7% 감소한 수치입니다. 전년동기 대비로는 96.9% 줄었습니다. 1위인 삼성전자도 반도체 수요 급감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인위적 감산 없다" 일축한 이유

시장과 업계에서는 내심 삼성전자도 감산 대열에 동참하기를 바랐습니다. 1위 업체가 감산에 돌입한다면 현재 쌓여있는 재고 소진에 도움이 됩니다.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반도체 가격이 오를 여지가 생깁니다. 삼성전자의 컨퍼런스콜에 시장과 업계의 시선이 쏠린 이유입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런 기대를 일축했습니다.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반도체 가격이 오르면 삼성전자에게 이익입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인위적 감산은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왜일까요. 삼성전자에게도 현 상황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지난 4분기 실적이 이를 방증합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지금이 오히려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를 뒤쫓고 있는 2, 3위 업체들과의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입니다.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이유는 이렇습니다. 통상적으로 반도체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면 수요 업체들은 1등 업체의 제품을 씁니다. 아무래도 같은 가격이라면 품질이나 평판이 더 좋은 제품을 사용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삼성전자가 노리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렇게 되면 삼성전자는 경쟁 업체들과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늘 강조하고 있는 '초격차'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생각인 겁니다.

여기에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원가경쟁력과 투자 규모 등을 고려하면 악조건 속에서도 충분히 승부가 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또 향후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만큼 잘 버틴다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인 겁니다. 김재준 삼성전자 DS부문 부사장이 “지금과 같은 시황 약세가 당장 실적에는 우호적이지 않지만 오히려 미래를 위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감산을 감산이라 부르지 못하고"

하지만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인위적 감산'은 없다고 못 박았지만 자연적, 기술적 감산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김 부사장도 “최고의 품질과 라인 운영 최적화를 위해 생산라인 유지 보수 강화와 설비 재배치 등을 진행하고 미래 선단 노드로 전환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단기 구간 의미 있는 규모의 비트그로스(bit growth·비트 단위로 환산한 생산량 증가율) 영향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해 여지를 남겨뒀습니다.

삼성전자는 올해 지난해 수준의 시설투자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통상적으로 시설 투자를 하게 되면 생산설비 재배치와 라인 유지 보수 강화, R&D 생산여력 확대에 돌입합니다. 제품 생산 대신 그 여력을 개발로 돌려 자연적으로 생산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삼성전자로서는 '인위적인 감산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실질적으로는 제품 생산량을 줄일 수 있는 '묘책'인 셈입니다.

삼성전자 평택 2라인 전경 / 사진제공=삼성전자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의미 있는 수준의 비트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말은 감산을 감산이라 부르지 못하는 삼성전자로서는 사실상의 감산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도 "라인 운영 최적화와 유지 보수 강화는 장비를 일정 기간 멈춰야 해 가동률과 생산이 줄어든다"며 "엔지니어 런과 설비투자의 R&D 비중 증가는 양산라인 대신 R&D 라인의 생산능력이 늘어나 그만큼 생산이 준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장과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실질적으로는 감산에 돌입하지만 이를 감산이라고 언급하지 않는 것에 주목합니다. 삼성전자가 감산을 공식화한다는 것은 곧 현 상황을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당장 수익은 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 지배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감산을 공식화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감산은 없다'는 삼성전자의 자신감. 과연 이 위기를 돌파할 동력이 될 수 있을까요. 함께 지켜보시죠.

정재웅 (polipsycho@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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