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낭비하는게 지겨워진’ 여자가 종교에 빠졌을 때[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3. 2. 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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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경. 문학과 지성사 제공 (C)Smeeta Mahanti

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320쪽 | 1만6000원

존 릴은 중국 옌지에서 탈북자들을 서울 보호소로 밀항시키는 미국인 활동가 조직에서 일했다. 북한 요원들에게 납치당해 평양 외곽의 강제 수용소로 들어간다. 동료 수감자들은 남한 가요를 흥얼거리다 이웃에게 들켰다거나 하는 따위로 잡혀 왔다. 그러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듯 폭군을 믿었다. 릴은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신앙을 갈구하는 이들을 보고 “누군가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을 깨닫는다. 독재자가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그가 그들을 사랑했다면? 피비가 빠지는 종교의 시작이었다.

피비는 피아노 의자에 여행 가방을 올려놓고 치던 때부터 음악에 고양됐다. “피아노의 깊숙한 내부에 스며들어가 이리저리 돌진했어요.” 독주자에게 가장 어려운 연주곡이라는 ‘리비흐(가상의 작곡가)의 에튀드 5번’에 도전한다. “연주라는 것은 자아가 없는 곳에서 탄생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리비흐의 곡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살아 있는 도관으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리비흐를 치면서부터 최고상들을 휩쓸었다. “승리의 기쁨이 입가에 피 맛처럼 감돌았어요.” 리비흐는 1951년 공연 실황 레코드의 에튀드 5번을 듣고 도달할 수 없는 경지란 생각에 전축을 엎어버린다. “내가 숭배하는 저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이룩한 것들에 내 성취를 보탤 수 없다면 이 삶을 음악에 바치는 건 아무 의미 없다”고 어머니에게 말한 뒤 피아노를 관둔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시댁 식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연애할 때만 해도 유순하고 고분고분했던 남자”마저 어머니를 온종일 타박했다. 어머니는 젖먹이 피비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다. 자신이 “박탈당한 위대한 삶을 대신 살 게 될 딸을 위해” 고생스럽게 일해 돈을 모은다. 미국으로 건너와 같이 살자는 아버지의 간청을 피비가 양쪽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받아들인다.

릴이 피비에게 접근한다. 미국 와서 작은 한인교회에서 위안과 존중을 받다가 나중에 예배를 집전한 아버지 ‘인 목사’가 릴이 옌지에서 활동할 때 도왔다. 맨발로 피비에게 다가온 릴이 말했다. “이 삶을 낭비하는 게 지겨워지면 연락하세요.” 별 관심이 없던 피비는 어느 날부터 릴의 집에서 열리는 기독교인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모임 이름은 ‘제자(弟子)’. 한국어 발음 그대로 불렀다. 릴의 부모 중 한 명도 한국인이다. 릴은 제자 모임 때마다 피비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말하라고 했다. “어머님은 부재를 통해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거예요.”

피비의 남자 친구는 윌 켄들이다. 켄들은 신학대에서 공부하다 ‘에드워즈 대학’(소설 속 가상 학교)으로 편입해 피비와 만났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켄들은 릴에게서 거짓말의 징후를 읽었다. 쌀을 훔친 다섯 살짜리 아이를 교수형에 처했다는 릴의 북한 수용소 목격담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도 위선적인 거짓말로 판단했다. “점쟁이가 늘어놓는 뻔한 거짓말로 이루어진 연극”이라고 여겼다. 미국 시민인 릴이 북한 수용소로 끌려갔는데 뉴스 한 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광신적 사이비 종교에 빠지다니.” 켄들은 제자 모임의 무엇이 피비를 끌어당겼는지를 알아내려 즉 거짓 연극이라는 걸 증명하려 제자 모임에 들어간다.

릴은 “약간의 고통이 마음을 깨끗이 해준다”며 제자들에게 커다란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다시 메우라는 지시를 내리곤 했다. 제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에게 말을 걸고, 고함을 치며 두 팔을 휘두르며 “헐벗은 녹스허스트(소설 속 가상의 배경 도시) 나무들은 주님의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나타내고 있다고, 그걸 읽어내는 법만 배운다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하나님은 존재하셨던 분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피비는 종교에 빠져든다. 켄들에게 “내가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나 또한 신성을 체험하게 될지도 몰라” 같은 말들을 했다. 켄들이 “(릴은) 프란치스코회식 교리를 꾸며대는 질 나쁜 예수쟁이일 뿐이야” 같은 말로 반박하면서 싸우는 일이 잦아진다. 켄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이비 종교에서 빼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다 찾아 읽지만, 소용이 없었다.

릴의 격렬한 독백 소재 중 하나는 수용소 시절 외국인 아이를 밴, 절박한 상황에 빠진 북한 여자의 임신중단을 도왔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맨해튼의 임신중단 반대 행진에 참석하라 지시하곤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자라나 있던 손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는 켄들이 자신에게 의문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곤 “아이들의 시체로 가득 찬 피의 강물이 이 나라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 피가 쏟아지게 놔둔 것은 우리입니다”라고 질타했다. 릴의 설교는 더 격렬해지고, 과격해진다. “하나님의 지혜는 느리게 움직이는 법이기에 그분이 나서서 하지 않으신 일들을 우리가 대신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과격해지지 않는다면, 달리 누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같은 말로 옥죄었다.

소설은 브라질 소설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살아 있는 물>의 한 구절 “모든 것의 밑에는 할렐루야가 있다”로 시작한다. 첫 장면은 ‘녹스허스트’의 한 빌딩 폭발이다. 바로 켄들의 독백이 이어진다. “피비. 건물들이 무너졌잖아. 사람들이 죽었고. 예전에 너는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지금 난 노력하고 있어.” 이 말은 작가 권오경이 ‘일렉트릭 리터러처’와의 인터뷰 때 한 말 “많은 사람이 신앙의 양극단에 서 있더라고요. 신을 믿는다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과 아예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나뉘는 거죠. 저는 그사이의 균열을 넘고 싶었어요”라는 말과 이어진다.

권오경은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미국으로 갔다. 기독교인으로 자라다 신앙을 잃었다. 김지현의 ‘옮긴이 후기’를 보면, 신앙의 상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고통이 소설의 동력이었다고 김지현은 전한다.

한국과 미국 현실 문제도 녹였다. 미국 속 한국은 여전하다. 피비 친구 줄리언 노의 부모는 동성애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게이 자식을 떠안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은 자식이 게이이면서 대학 중퇴자이기까지 하는 거”라서 등록금을 댔다. 권오경은 커밍아웃한 바이섹슈얼이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 외국인 노동자 착취, 인종차별 문제를 곳곳에 넣었다. 릴의 대사로 한국 종교에 대한 평도 실었다. “다가올 부흥의 원천이죠. 한국인들보다 영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들은 믿는 걸 넘어서서 헌신적이에요. 순수주의자들의 땅이죠.”

광신 못지않은 남자(켄들)의 여자에 대한 집착과 통제 문제도 읽을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면, “손가락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빨라져 갔다” 같은 구절을 두고 굴드나 우치다 등 여러 피아노 독주가의 연주를 떠올릴 수 있다.

권오경이 10년 동안 써 2018년 발표한 이 소설은 영어권 국가 여러 매체에서 호평받았다. <애프터 양>과 <파친코>의 코고나다가 드라마로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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