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봉제’의 항변 “나는 왜 정권 바뀔 때마다 소환되나”

황보연 입력 2023. 2. 4. 07:05 수정 2023. 2. 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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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동 거는 ‘임금체계 개편’
2020년 7월14일 한국공항공사의 자회사 노동자들이 준법투쟁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자회사 신설 등을 통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지만, 임금 등에서 실질적 처우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반발했다. 연합뉴스

내 이름은 ‘호봉제’입니다. 우선 간략히 자기소개를 해볼까 해요. 한번쯤 들어봤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테니까요. 특히 저와 함께 회사를 다녀보지 못한 엠제트(MZ) 세대가 그렇겠지요. 호봉은 임금이 결정될 때 쓰이는 등급입니다. 임금체계는 기본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따라 이름표가 달라집니다. 나이와 학력, 경력 등 개인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는 ‘속인급’(person-based pay)과 직무의 상대적 가치를 중심에 두는 ‘직무급’(job-based pay)으로 크게 나뉘는데요. 저는 속인급 임금의 대표주자입니다.

국내에서는 근속연수를 기준으로 호봉표를 정한 뒤, 해마다 1호봉 혹은 2호봉씩 임금(승급분)을 올려주는 식으로 쓰여왔지요. 예를 들어 공무원 봉급표를 보면, 1~9급별로 1호봉부터 23~32호봉까지 임금(기본급)이 상승되는 단계를 볼 수 있어요. 2023년 기준 9급 1호봉은 월 177만800원, 같은 9급의 31호봉은 341만4500원입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저는 단골로 소환돼왔어요.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 그만 짐 챙겨 떠나라는 식이죠. 이번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없애는 대신에 ‘직무·성과’ 중심 임금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 밑그림을 짜는 전문가 그룹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지난 연말(12월12일), 이런 내용을 담은 권고문을 내면서 저를 “다수에게 불공정한” 임금체계로 규정했어요. 졸지에 노동시장의 임금 격차를 심화시킨 주범으로 지목된 셈이죠.

윤 대통령의 언급은 좀 더 노골적인데요. “직무 중심, 성과급제로 전환을 추진하는 기업과 ‘귀족노조’와 타협해 연공서열 시스템에 매몰되는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차별화돼야 한다”(올해 신년사의 한 대목)며 저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임금체계 개편을 주도할 상생임금위원회를 지난 2일 발족시켰는데요, 전환 기업에 세금 혜택을 주는 등 인센티브를 줄 계획이라고 해요. 며칠 전(1월30일)에는 2021년 말 35곳에 불과한 직무급 도입 공공기관의 수를 내년까지 100곳, 2027년까지 200곳으로 늘리겠다는 발표도 나왔어요. 민간 기업을 강제하긴 어려우니, 정부가 사용자로 있는 곳부터 손보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이죠. 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 모두에게 공정한 임금체계가 들어서는 걸까요? 전문가들은 임금은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영역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나라별로, 산업별 혹은 직종별 실정에 따라 바람직한 임금체계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죠.

열쇳말: 임금체계

임금체계는 임금(기본급)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기준으로 나뉜다. 호봉제는 연령이나 근속연수 등을 기준으로 호봉표를 정하고, 해마다 1호봉 혹은 2호봉씩 자동으로 기본급이 인상되는 구조다. 하는 일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직급 또는 등급이면 같은 수준의 기본급을 받는다. 직무급은 직무 분석 및 평가를 통해 직무가치를 매긴 뒤, 그 상대적 차이에 따라 기본급이 결정되는 체계다. 이 밖에 직무수행에 필요한 개인의 능력이나 숙련도 등에 따라 직급이 결정되는 직능급과 직책·직무를 기준으로 임금을 차등화하는 역할급이 있다. 성과급은 노동 성과를 측정해 그 결과에 따라 임금을 주는 것인데, 기본급의 차등 인상과 기본급 외의 별도 인센티브(개인·집단) 등이 포함된다.

초창기 존재감, 이후 끊임없이 도마에

저는 경제개발이 본격화한 1960년대부터 터줏대감이 됐습니다. 전후 국가 경제를 빠르게 재건해야 했던 일본과 한국에서 특히 저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고 해요.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인 만큼, 기업들은 장기근속을 유도할 목적으로 저를 들이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임금이 오르기 때문에, 노동자 입장에서도 안정적으로 생애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요 .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이런 연원을 덧붙입니다. “전후 일본 기업들이 숙련공을 구하기 어렵다 보니 임금을 한번에 10% 혹은 20% 이상 올려주기도 했다고 해요.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것보다 차라리 해마다 일정하게 임금을 올려주자고 한 것이 호봉제가 됐다는 거죠.”

윤 정부가 노동개혁의 표적 집단으로 삼고 있는 대기업 생산직에 호봉제가 안착된 것은,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입니다. 이 무렵부터 호봉이 해마다 오르는 정기승급제가 생산직에도 확대 적용됐어요. 그 이전에는 사무직과 다르게 생산직은 호봉 단계가 많지 않거나 ‘말호봉’(끝호봉)으로 묶여 있었는데, 노조의 힘이 커지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1990년대 이후에야 생산직에 호봉제가 정착되었다고 하죠.

저를 바꾸자는 요구는 사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어요. 1960년대에는 국영 기업들이 외국 차관을 제공받기 위해 직무급을 도입한 적이 있었고요. 1980년대에는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직능급(숙련급)이 유행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외환위기 이후로는 기업들이 성과주의에 부쩍 관심을 보이면서 연봉제가 확산됩니다. 하지만 ‘무늬만 개편’이라는 평이 뒤따르기도 했어요. 임금 구성 항목만 살짝 바꾸거나, 저와 공존하는 형태로 한지붕 두집 살림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2000년대 이후 경제 환경이 급변하면서, 저는 좀 더 궁지에 내몰리기 시작해요.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일본에서는 연공형 임금의 전제조건으로, 기업 내 인력 구성에서 청년보다 고령자가 더 많으면 안 된다는 점과 기업 성장이 정체되거나 하락해선 안 된다는 점 등을 꼽는다고 해요. 고성장에서 저성장 경제로 진입한데다 저출산·고령화 속도마저 가파른 구조에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얘깁니다.

속속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엠제트 세대들의 반감도 살펴볼 대목입니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데다, 비슷한 일을 하면서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 차이가 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예요. 한국경제연구원은 수시로 이런 통계를 냅니다. 1년 미만 입사자의 임금 대비 30년 근속자의 임금 수준을 비교하는 건데요. 한국은 2.95배, 일본은 2.27배 정도 되고요(이상 2020년 기준), 유럽 15개국 평균은 1.65배(2018년)라고 해요.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상생임금위원회 발족식 및 첫 회의에서 위원장을 맡은 이재열 서울대 교수(정면 줄 왼쪽 셋째)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호봉제 폐지 시도, 한 발도 못 나간 사연

사정이 이런데도, 저는 아직 건재한 편입니다. 노동부의 사업체노동력조사 부가조사 결과(2022년 6월 기준)를 토대로, 국내 기업들의 임금체계 현황이 어떤지 볼까요? 기본급 임금체계가 아예 없는 곳이 전체의 61.1%로 가장 높은 비중인데요, 저임금 직종이 몰려 있는 등의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이어 호봉급과 직능급이 각각 13.7%를 차지하고, 직무급은 10.8%에 그칩니다. 규모가 클수록, 노조가 있는 경우 호봉급 도입 비중은 더 높아집니다. 100명 이상 업체로 보면, 무노조 사업체는 47.0%, 유노조 사업체는 65.4%에 달해요. 전문가들은 설문으로 이루어지는 조사의 한계로 인해, 직능급과 직무급이라고 답한 곳 가운데 상당수도 호봉제에 더 근접한 것일 수 있다고 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제가 아직 버티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사회적 합의나 공감대 없이 정부 일방에 의해 추진되는 임금체계 개편은 사실상 헛발질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2016년 기존 간부직에 적용되던 성과연봉제를 일반 직원으로 확대 적용하라는 지침을 낸 바 있어요. 저를 근간으로 하던 임금체계를 뜯어고쳐, 기본연봉과 성과연봉, 기타수당으로 구성하도록 한 것이죠. 상·하위 등급자의 임금인상률 차등 폭도 키우고요. 이사회 의결만으로 시행된 지침은 공공기관 노조의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철도노조의 경우, 역대 최장 기간인 74일간의 파업을 벌이기도 했어요. 극심한 노사 갈등은 취업규칙무효확인 소송 등이 제기되면서 법정 공방으로도 이어졌는데요. 대체로 법원은 노조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종전보다 노동조건이 불리해지는 이들이 나올 수 있으니, 노조나 노동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취지였지요.

‘호봉제 폐지’는 유독 보수 정부에서 강하게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배경에는 ‘노조 힘 빼기’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뒤따라왔는데요.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권고문을 통해 “유노조 대기업에 종사하는 정규직 남성 임금이 높은 이유는 연공 축적이 가능한 유일한 계층”이기 때문이라고 콕 짚기도 했어요. 연구회가 부분대표제 도입을 권고한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렇게 되면 임금체계를 바꾸려고 할 때 특정 직무·직종·직군만 변경할 수도 있거든요.

노동시장 내 이중구조와 임금 불평등의 원인을 제 탓으로만 돌린다면, 앞으로도 노사정 대화는 요원할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강철 공공운수노조 공공기관사업본부장은 “노동시장의 임금 격차 문제는 정규직의 연공급 임금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같은 사업장 내에서도 고용 형태 등에 따라 임금을 차별해온 기업의 이중적 고용정책이 초래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현재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 수준은 63.6%(2022년 8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기준·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에 그칩니다.

2016년 10월10일 전국공공운수노조는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추진 등에 항의하며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무늬만 개편? 직무급 둘러싼 동상이몽

후임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저로서는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대안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이 바로 직무급인데요. 직무의 상대적 가치에 따라 기본급이 매겨지는 임금체계입니다. 직무의 난이도나 업무 강도 등을 잘 따져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이런 분석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해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직무급을 두고 노사정 각 주체가 동상이몽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노동계는 원칙적으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지향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지향은 저보다는 직무급과 더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독일처럼 산업별 교섭을 통해 노사가 적정 임금을 함께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역대 정부와 경영계는 직무급 도입을 외쳐왔지만, 그간의 행보를 보면 직무급보다는 성과에 따른 차등 보상에 더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성과연봉제가 그런 형태였고요. 이번에 윤 정부가 추진하는 직무·성과급도 마치 직무급과 성과급이 한 세트인 것처럼 혼선을 주고 있죠. 성과주의 임금은 단기 실적주의 초래나 평가 공정성 논란 등의 부작용으로 인해, 직무급과 분리해서 언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직무급 역시 본래 취지를 훼손했다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어요. 공공기관 비정규직들을 자회사 신설 등으로 정규직 전환한 뒤 직무급 임금체계를 적용한 것이었는데요. 청소·경비·시설관리·조리·사무보조 등 5개 직무 등급별로 최대 6단계가 넘지 않도록 승급 단계를 설계한 것이었어요. 공공기관 자회사 노동자들이 속한 공공산업희망노조의 정태호 위원장은 “정규직 전환된다고 해서 임금이 어느 정도 오를 것으로 기대했는데, 1단계에서 6단계까지 올라가더라도 별 차이가 없는 구조”라며 “종전에 서로 다른 용역회사에 속해 있던 비정규직들을 제한된 인건비 총액 한도 내에서 하나의 임금체계로 묶어내다 보니 제도가 급조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직무급 도입 기업은 대웅제약입니다. 2017년 직무급을 도입한 이 회사의 기본급은 직무가치와 기본임금인상률(개인성과)로 짜여 있습니다. 신입사원부터 전무까지 9개의 직급체계도 팀원-팀장-본부장의 3단계 직무체계로 바뀌었어요. 직무가치를 평가할 때는 동종 업계 상위 5개사의 직군별, 직급별, 연차별 보상 수준을 반영했다고 해요.

“호봉제에서 직무급으로 갈 때 직원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임금 삭감 여부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처음에는 기존 연봉 수준을 보전해주는 조건으로 시작했어요. 호봉제 선호도가 높은 생산직에도 선택권을 줘서, 원하는 사람들만 직무급을 신청하도록 유도했고요.” 박상준 대웅제약 인사팀장의 설명입니다. 유규창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종전의 직무급 도입 기업들은 사무직 중심으로만 하거나 컨설팅 업체 도움을 받아왔는데, 대웅제약은 본인들이 스스로 연구조사해서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연공서열 임금은 한국·일본에만 있다?

답답한 마음에,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에게 질문을 던져봤어요. “호봉제는 정말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구시대의 유물 같은 것이냐”고. 그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했습니다.

―유럽에도 호봉제가 있나요?

“같은 이름을 붙이지는 않지만,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도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seniority wage)을 올려주는 기업이 적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처럼 그 곡선(기울기)이 가파르지 않다는 차이는 있죠. 핀란드·스웨덴·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직무에 따라 임금을 받는 체계가 좀 더 확립된 편이고요.”

―임금체계에 연공성을 두는 이유가 뭘까요?

“임금을 결정할 때는 객관적 기준이 필요한데, 많은 이들이 타당하다고 보는 잣대가 나이라고 보는 거죠. 유럽에서도 논쟁은 많았어요. 청년들은 손해 보는 것 아니냐,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적 요소가 있는 것 아니냐 등등. 하지만 요즘은 좀 수그러들었어요. 임금체계를 바꾼다고 비정규직 차별이 해소되는 게 아니니까요.”

―미국은 호봉제와는 거리가 더 멀겠죠?

“(직무급을 활용하는) 미국은 좀 다르죠. 다만 미국에서는 해고 기준을 정할 때 연공적 요소를 반영합니다. 맨 마지막에 채용된 신규 인력을 가장 먼저 해고하는 식입니다.”

―바람직한 임금체계란 무엇일까요?

“완벽한 체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죠. 다만 한국은 호봉제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왔고 일부 타당한 내용도 있지만, 그다음 단계로 너무 진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직무급으로 이동하기 위한 행보가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봐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조가 협상을 주도해야 해요. 일률적으로 임금 수준이 하향되는 일은 많지 않겠지만, 고령 노동자의 임금이 깎일 수는 있거든요. 자칫 노-노 갈등이 불거질 수도 있는데, 그런 문제에 대한 조정도 노조가 나서야 합니다. 사실 기업이 나서서 직무급을 도입하려는 곳들은 많지 않아요. 도입 및 유지 비용이 매우 많이 들고, (한 사람에게) 여러 영역의 일을 시키고 싶어 하는 한국 기업들은 외려 꺼릴 수도 있거든요.”

노동계는 왜 임금 이슈 선점 못 하나

앞으로 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일단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지 않고 어느 일방에 의해 추진되는 임금체계 개편은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고 전문가들은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개별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전망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그는 “독일은 산업 단위별로 노사가 직무가치를 설계하는 전문가 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각각의 장점을 버리기 힘들다면 ‘하이브리드’ 방식으로의 전환도 고려해볼 만합니다. 오계택 소장은 “우리나라와 일본은 속인주의에서 직무 중심으로, 서구에서는 직무 중심에서 조직과 개인을 강조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며 “두가지를 어떻게 결합해서 균형을 잡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며, 다른 나라에서도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기존 호봉제로 대표되는 임금의 연공적 성격을 다소 완화하는 한편, 처음부터 직무가치를 너무 세세하게 분류하지 말고 넓은 범위로 묶어서 직무급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독일에서 시행되는 직무급도 직장에서 일정한 레벨(근속)을 거친 뒤 임금 등급이 향상되는 체계가 있다. 우리나라 같은 연공급 행태(30호봉 안팎)는 아니지만 중범위 수준의 테이블(9~15개)을 갖고 있다”고 설명해줍니다.

노동계가 좀 더 적극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옵니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비정규직 처우 개선 등과 다르게, 임금은 노동계가 한번도 선점하지 못했던 이슈라는 취지입니다. 김종진 소장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근본적 취지는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들에게 같은 기본급을 지급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주도해온) 협의 수준의 임금체계 개편 논의에서 벗어나, 고용형태별·성별·기업규모별 임금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이를 위해, 간호사나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등과 같이 국가자격증을 갖추고 있고 공공 서비스가 민간에 위탁된 직무부터 선제적으로 추진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도움말 주신 분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 김하나 노사발전재단 혁신컨설팅팀장, 김종진 일하는 시민연구소장,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사회학), 유규창 한양대 경영대 교수,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 연구위원, 강철 공공운수노조 공공기관사업본부장, 정태호 공공산업희망노조위원장, 박상준 대웅제약 인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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