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아파도 병원 못 가요"…소아과 '진료 대란' 벌어졌다 [오세성의 아빠놀자]

오세성 입력 2023. 2. 4. 07:01 수정 2023. 2. 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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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성의 아빠놀자(26)
'오픈 런' 벌어지는 동네 소아과 진료
줄줄이 폐원…지자체 4곳 중 한 곳은 소아과 없어
대학병원도 전공의 207명 모집에 33명 지원
진료체계 사실상 붕괴…"아이 어떻게 키우나"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가천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에서 외래 진료를 본 소아 환자와 보호자가 나오고 있다. /사진=한경DB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백모씨(35)는 최근 아이가 아파 동네 소아청소년과를 찾았다가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4살 아이가 새벽부터 고열에 시달리면서 급하게 연차를 내고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았는데, 진료가 불가능하니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라는 안내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 병원은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으로 우선 예약받고 그와 병행해 현장 접수도 진행하는 곳이었지만, 접수 인원이 많아 마감됐다는 이유였습니다.

결국 백씨는 근처 내과를 대신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도 2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아이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접수에 실패해 소아청소년과에 가지 못한 아이와 부모들이 내과, 이비인후과, 가정의학과 등으로 향하는 바람에 진료가 밀렸기 때문입니다.

백씨는 "소아청소년과 예약 앱은 접수가 시작되면 바로 마감된다. 현장 접수는 말 그대로 '오픈 런'"이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아이들은 갑자기 아프기에 병원을 예고 없이 가야 할 때가 많다"며 "병원 다니기조차 이렇게 힘들어서야 아이를 어떻게 낳고 키우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푸념했습니다.

 "연차쓰고 소아과 찾았는데"…지자체 4곳 중 1곳은 없어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맞벌이 부부는 반차나 연차를 내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상황이 됩니다. 회사 눈치를 보며 병원에 갔는데, 아이가 진료받지 못한다면 부모 마음은 타들어 갑니다. 전업주부의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프다고 울며 보채는 아이를 안고 하염없이 몇 시간이고 기다리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서울에 거주하기에 소아청소년과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백씨의 사정은 나은 편입니다. 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전국에서 662개 소아청소년과가 폐원했습니다. 연평균 132곳이 문을 닫았다는 얘깁니다. 개원과 폐원을 합쳐도 이 기간 소아청소년과는 3308개에서 3247개로 61곳이 순감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지방자치단체 4곳 중 1곳꼴로 소아청소년과가 사라졌습니다. 전국 226개 지자체 가운데 경기 연천군, 충북 괴산군, 전남 함평 및 신안군 등 58곳에 소아청소년과 의원이 단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아청소년과 문조차 두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동네 병원이 없다면 큰 대학병원에 가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서울대학교어린이병원에서 열린 필수의료 지원대책 현장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인천의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길병원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에 걸쳐 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를 중단했던 바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레지던트) 지원자가 0명을 기록하면서 인력 부족으로 입원 병동 운영을 멈췄던 것입니다. 다른 대학병원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국 대학병원 96곳 가운데 55곳이 올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뽑지 못했습니다. 지원자가 없었던 탓입니다.

올해 상반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207명을 모집했는데, 지원자는 33명에 불과했습니다. 지원율은 15.9%에 그칩니다. 의사가 점차 줄어들면서 아이들이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한아동병원협회에 따르면 전국 2·3차 의료기관 가운데 24시간 소아청소년 응급 진료가 가능한 곳은 38%에 그쳤습니다.

소아청소년과 응급전담전문의가 1인 이상 있는 곳도 33%에 불과했습니다. 전국 병원 가운데 소아 환자가 응급치료받을 수 있는 곳은 3곳 중 1곳뿐이라는 의미인데, 사실상 동네 의원부터 대학병원까지 진료체계가 무너졌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 힘들고 보상은 적어…소아과 기피하는 의대생들

보건복지부는 급하게 소아 진료 중심의 필수 의료 지원대책을 내놨습니다. 응급의료기관 평가 기준 등에 소아 환자 진료 지표를 신설하고 소아 전문 응급의료센터를 추가 지정하기로 했습니다. 의료인이 24시간 상담을 제공하는 ‘소아 전문 상담센터 시범사업’ 추진도 검토합니다. 소아 입원진료 인프라가 유지될 수 있도록 입원료 인상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병원에서 진료 받는 아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다만 이러한 조치로 부족한 의사를 충원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의대생들의 소아청소년과 기피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소아청소년과는 환자가 스스로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해 진료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며 "아픈 아이와 동행한 보호자가 날 선 태도로 의료진을 대하는 경우도 잦다. 소송 위험도 성인보다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그렇다고 다른 과에 비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은 힘들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는 일도 많고, 돈마저 안 되니 전공의들이 지원을 꺼린다"고 토로했습니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미래 비전 상실과 보상지원 미비로 필수 의료에 대한 전공의 기피 현상이 악화하고 있다"며 "1차 진료 회복을 위한 수가 개편과 중증도 중심의 2, 3차 진료 수가 개편은 물론 소아청소년과 전공의에 대한 수련 지원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의대생이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하면 일반의가 되고 이후 대학병원 등에서 근무하며 수련받는 전공의(레지던트)가 됩니다. 통상 4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치고 다시 시험에 합격해야 전문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전문의들이 소아청소년과를 비롯한 동네 병원을 개원하는 구조입니다.

의과대학 입학부터 따지면 전문의 한 명을 양성하기까지 10년 넘게 걸립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현업에 있는 의사들이 장기간 녹록치 않은 환경에 노출되었고, 그 모습을 목격한 의대생들이 수년 전부터 소아청소년과를 기피해온 결과가 이제서야 나타났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병원 다니기조차 힘들다'는 부모들의 한탄이 줄어들 수 있도록 정부가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대처에 나서길 기대합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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