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N수학] 필즈상 허준이 父 허명회 교수 “듣는 능력이 중요”

이채린 기자 2023. 2.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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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크기 줄이고, 집에 칠판 놓아 보세요"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 (허준이 교수 부친). 허명회 제공

2022년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필즈상을 수상하자 그의 아버지 허명회 고려대학교 통계학과 명예교수에도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허명회 교수도 수학을 기본으로 하는 통계학 분야의 권위자인데다 40년 넘게 후학을 양성해 온 존경받는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3일 새해 벽두, 허 교수가 부산영재교육진흥원에서 영재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학동아'가 따라가 허 교수를 만났다. 

“손자가 아빠가 받은 필즈상이 수학상이란 걸 알자마자 바로 ‘아빠, 나 수학 안 할 거니까 나보고 수학하라는 이야기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맞는 판단이에요. 자식이 부모처럼 될 확률이 적거든요. 저는 그걸 모르고 제 아들이라 수학을 잘하겠거니 생각해서 영재로 만들려고 직접 수학을 가르쳤어요. 그랬더니 오히려 아들이 수학에서 멀어지더라고요.”

허명회 교수는 자신과 아들의 성공, 나아가 부모와 자식의 성공 사이의 관계에 선을 그으며 말을 시작했다. 대신 가정에서 반드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을 길러 줘야 미래에 맞는 인재로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로 허 교수는 “수학을 비롯한 모든 능력은 언어 능력을 기반으로 자란다”면서, “어떤 결과든,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를 문자나 말처럼 언어를 통해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들었다. 인공지능보다 인간이 낫다고 볼 수 있는 능력은 창의성으로, 이 능력은 제대로 듣거나 읽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대학에서 학생들 여럿이 토론 면접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자주 관찰되는 현상은 학생 A가 말할 때, B와 C는 A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본다는 거예요. A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면 좋은 점수를 받기가 힘들어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잘 말할 수 있으니까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은 가족끼리 서로 질문을 주고받고, 부모의 가치관과 지식을 자연스레 전수하는 대화를 하면서 가장 잘 습득된다. 맞벌이 부부였던 허 교수는 일로 바쁜 시기에도 이틀에 한 번 꼭 가족 다 같이 저녁을 먹었고, 주말은 온전히 ‘아들과의 시간’으로 정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대화를 늘리기 위해 가정에서 가구 배치를 바꾸면 좋겠다며 몇 가지 조언을 남겼다. TV 크기를 줄이고, 거실에 소파 대신 둘러앉을 테이블을 놓고, 칠판을 두는 것이다. TV가 너무 크고, TV 앞에 소파가 있으면 가족들이 모여 대화 없이 TV만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허 교수의 집에는 30년 전부터 칠판이 있었고, 현재는 칠판이 3개 있다. 손자는 허 교수 집에 오면 직접 만든 문제를 할아버지에게 내곤 한다. 

“칠판이 있으면 가족들이 오고가며 생각나는 걸 쓰며 대화하기 좋아요. 아이의 경우 칠판이 있으면 학교에서 본 선생님의 모습을 따라하면서 배운 내용을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부모한테 그 내용을 가지고 문제를 내면서 완전히 복습하고 이해할 수 있지요.”

1985년 설악산 신흥사에서 허명회 교수(왼쪽)와 어린 허준이 교수. 허명회 제공
왼쪽부터 허명회 교수와 허준이 교수 가족, 허명회 교수 아내 이인영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다. 허명회 제공

물론 칠판이 있다고 해서 가족간의 대화가 바로 늘기는 쉽지 않다. 서로 노력이 필요한데, 허 교수는 특히 자녀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부모의 노력을 강조한다.

“아들은 중학교 때 가수 김건모의 노래를 좋아했는데, 클래식 애호가인 저는 왜 이런 노래를 듣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이렇게 해서는 대화가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수십 번이고 반복해서 김건모 노래를 들었어요. 그러다보니 좋아지는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김건모 노래를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자녀가 좋아하는 걸 직접 해보면 좋겠어요.”

허 교수는 손자가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에 맞춰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 ‘블랙핑크’를 자꾸 ‘핑크블랙’이라고 말해서 혼나지만 말이다.  
 

수학동아 DB

또 하나 질문, 자녀가 방황하고 있어 대화를 할 수 없을 때 부모는 어떻게든 자녀를 식탁에 끌고 와 이야기를 해야 할까. 허 교수는 단호하게 “그럴 필요 없다”라고 답했다. 허준이 교수가 대학 시절 뭘 해야 할지 몰라 긴 방황의 터널을 지날 때 허 교수는 그저 옆에 있었다. “맘껏 자고 푹 쉬어라”라고 이야기하고 함께 인근 산에서 산책하며 가정이 자녀의 따뜻한 보금자리라는 점만 전하려고만 했다. 그러다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맞아줬다. 

“자녀가 직접 부딪쳐 보지 않으면 몰라요. 세게 부딪쳐 봐야 해요. 부모가 자기 생각을 강요하기보다는 자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합니다.”

● 수학의 본질은 논리 아닌 창의

Q. 학창시절 수학을 좋아해서 서울대학교 계산통계학과에 진학했나.  

"어릴 적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나보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조각가인 외삼촌과 함께 살아서 그림을 자주 그리고 이것저것 만들면서 예술가를 꿈꿨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자연 너머의 세계를 설명하고 도전적인 과제를 주는 수학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수학을 잘하기도 해서 진학을 결심했다. 이후 통계학을 더 공부하기로 했다. 어디서든 데이터를 쓰기 때문에 어떤 분야의 사람과도 이야기할 수 있어 무척 재밌었다. 최근 데이터사이언스가 중요해지면서 통계학은 더 뜨거운 분야가 됐다. "

Q. 수학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수학을 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수학의 본질은 창의라고 생각한다. 논리는 창의적인 생각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계산을 더 잘하고 논리적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계산하고 문제를 푸는 기술은 앞으로 더 중요하지 않다."

Q. 창의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래 여유 있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쉬운 문제 풀이를 반복하는 것보다 한 문제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게 낫다. 많은 학원에서 문제를 풀면서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게 하는데, 이건 기계가 빅데이터를 학습하는 방법이다. 빅데이터 분석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인간은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할 수 없게 태어났다. 중학생 때 수학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아들도 1주일 동안 하나의 체스 문제를 붙잡고 늘어졌다. 

또 어떤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일종의 암기인데 자세히는 맥락을 이해하면서 암기하는 능력이다. A를 배울 때 A가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흐름을 이해하면서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인 이상 배운 걸 잘 기억해야 그것을 바탕으로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문제를 생각할 때 약간의 소음이 있는 장소에서 계속 서성이곤 한다. 뇌과학적으로도 서 있을 때 뇌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

Q. 모든 사교육은 별로일까. 

"문제 풀이 방식에서 벗어난 교육을 시도하는 사교육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곳은 추천한다. 예를 들어 수학을 공부할 때 그룹을 짜는 거다. 학생들이 서로 배운 수학 개념을 설명하고, 가르쳐 주고, 어떤 정리를 공부했는데 왜 중요한지, 어떤 부분에서 큰 감동을 받았는지를 이야기 나누면 어떨까. 일타 강사가 가르치는 강의를 듣고 공부한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서 큰 경쟁력이 없을 수 있다."

Q. 마지막으로 학생들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내가 통계학자지만 지나치게 계산하며 살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일을 할 때 돈, 명예부터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일의 아름다움이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나도 가정형편이 안 좋았음에도 공부가 좋아서 그냥 계속했다. 필즈상 수상(상금은 약 1500만 원)과 100억 원을 고르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필즈상 수상을 고른다. "

※관련기사

수학동아 2월호, [인터뷰] 필즈상 허준이 교수 아버지 허명회 고려대학교 통계학과 명예교수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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