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바게트 시위대'…푸틴이 유럽 빵집들 거덜낸 기막힌 사연 [세계 한잔]

서유진 입력 2023. 2. 4. 05:00 수정 2023. 3. 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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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잔]은 우리 삶과 맞닿은 세계 곳곳의 뉴스를 에스프레소 한잔처럼, 진하게 우려내 한잔에 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선 바게트와 크로아상 등 빵을 움켜쥔 수백명의 제빵사들이 거리를 메웠다. 이들은 "치솟는 재료비 탓에 빵집이 위협받고 있다"고 외쳤다.

제빵사들은 앞치마 복장을 한 해골모형을 관에 넣으며 "업계가 죽어간다"고 성토했다. 2017년 대선 후보였던 장 라살은 AFP통신에 "제빵사들은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11월 말, 프랑스의 바게트 제조 노하우와 문화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선정된지 한달 여 만에 제빵업계가 절망에 빠졌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2023년 1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한 제빵사가 시위 도중 바게트를 움켜쥐고 있다. 수백 명의 제빵업계 종사자들이 이날 높은 재료비, 전기료 등으로 사업을 접을 위험이 있다며 시위를 벌였다. AP=연합뉴스

이번 시위는 유럽에서 설탕·밀가루·버터 등 빵에 들어가는 주 재료비 상승과 에너지가 폭등에서 촉발됐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유럽의 인플레이션 최대 희생자는 바로 빵집"이라면서 "원가를 감당하지 못한 일부 유럽 제과업체들은 감산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에서 설탕·밀가루·버터 등 빵에 들어가는 주요 품목 가격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한 빵집에서 직원이 바게트를 봉지에 넣는 모습. 신화=연합뉴스

특히 설탕값 상승은 살인적이다. 유럽연합 통계국(유로스탯)에 따르면 프랑스의 설탕 소비자가는 전년 대비 23% 올랐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51%, 독일은 63% 치솟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설탕값이 폭등한 이유는 저조한 수확량 탓이다. 유럽 최대 제당 회사인 쥐트주커에 따르면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무 재배 토지 면적이 전년 대비 4% 줄었다. 덥고 건조했던 지난해 여름 날씨도 수확량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2022~23년 유럽연합(EU)의 설탕 생산량은 전년보다 6.9% 감소한 1550만t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설탕 수출 1위인 브라질이 악천후를 이유로 생산량을 16% 줄였다. 2위 인도 역시 수출 쿼터를 절반으로 줄이는 등 공급 부족까지 겹쳤다.

러시아는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관을 막았다. 이 때문에 가스가격이 뛰고 유럽은 대체원을 찾아야 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있는 액화석유가스(LPG) 탱크. 로이터=연합뉴스

설탕 가격 급등의 진짜 '주범'은 치솟은 천연가스 가격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사탕무가 설탕이 되려면 뿌리를 잘라 70~75°C의 물에 장시간 가열해야 하는데, 유럽 대부분의 설탕 공장은 이때 천연가스를 쓴다.

현재 유럽의 가스 가격은 폭등세다. 지난해 2월 개전 이후 유럽이 미국과 함께 대(對)러 제재에 나서자, 러시아는 유럽향(向) 천연가스 공급을 대폭 줄이면서 '가스 무기화'에 나섰다.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가 폭등 여파가 설탕 가격 상승으로까지 이어졌단 얘기다.

일부 공장에선 설탕 제조에 쓰는 연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서 생산 단가는 더 오르고 있다. 독일 설탕 생산업체인 노르트주커는 연료의 80%를 천연가스 대신 석유로 전환했다.

유럽의 설탕 가격 상승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에너지가 상승세는 여전하고, 사탕무 재배용 비료 가격도 역사적 고점이다. 제당회사 쥐트주커 측은 로이터 통신에 "올해 설탕 가격을 또 올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에서는 연간 60억개의 바게트빵이 구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빵에 들어가는 각종 재료 가격이 급등하면서 제빵업계와 소비자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제빵업계는 재룟값 상승에 이어 전기료 폭탄까지 맞으면서 휘청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전기 요금은 가스 가격에 연동된다. 프랑스 정부는 가스 가격이 폭등하자 가정용 전기요금에 인상 상한선(4~15%)을 설정해 보호했지만, 소규모 빵집의 경우 혜택에서 제외됐다. 일부 빵집은 전년 대비 전기 요금이 10~12배 뛰면서 문을 닫았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사진)이 국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정부는 제빵업계 달래기에 나섰다. 지난달 초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이 전력공사·토탈에너지 등 에너지업계 관계자를 만나 제빵업계를 위한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르메르 장관은 "프랑스의 바게트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지 한 달 만에 제빵업계를 절망에 빠뜨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바게트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마법 같은 250g"이라며 극찬했지만, 제빵사들은 "정부가 도움준 게 뭐가 있냐"며 냉소했다.

빵값이 치솟자 소비자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유럽 빵값은 지난해 전년 대비 평균 20% 올랐다. 이코노미스트는 "올해는 빵류가 비싸져 자연스럽게 단 것을 덜 먹는 해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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