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시인 된 후 떠난 그녀… 작품 묻히긴 아까웠죠”

정지섭 기자 2023. 2. 4.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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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법원 직원 52세 최란주씨
신춘문예 당선 6개월 후 세상 떠나
동료 정준호씨, 자비로 유고시집 내
2020년 7월 세상을 떠난 최란주씨의 남편 윤대룡(왼쪽)씨와 동료 정준호 전 수원고등법원 사무국장이 지난달 30일 최씨의 시집 출간 기념 모임을 열었다. 손에 든 책이 최근 출간된 유고 시집. /정지섭 기자

2019년 12월, 서울행정법원 직원 최란주(당시 52세)는 전화 한 통을 받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는 연락이었다.

28년 동안 법원 공무원으로 법원과 등기소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시를 쓰며 문청(文靑)으로 살아온 그가 뒤늦게 꿈을 이룬 순간이었다. 신문 지면에 얼굴 사진과 함께 당선작 ‘남쪽의 집수리’가 실렸다. 동료들은 “법원 시인이 나왔다”며 기뻐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뇌경색, 모야모야병 등 병마가 한꺼번에 찾아들면서 신문춘예 당선증을 받은 반년 뒤인 2020년 7월 숨을 거뒀다.

최란주씨

최란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 ‘그대는 그대이기 때문입니다’(학이사)가 최근 출간됐다. 고인이 생전 법원 소식지에 투고했던 시와 미발표 시 등 유작 250편 중 100편을 추렸다.

고인의 법원 동료이자 상사인 정준호(62) 전 수원고등법원 사무국장이 자비를 들여 출간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방배동의 작은 카페에서 고인을 추억하는 이들이 모여 조촐한 출간 기념 모임을 가졌다.

38년간 법원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작년 말 정년 퇴임한 정 전 국장은 법원 소식지에 주기적으로 실리던 고인의 시에 진작 마음이 끌려 꼬박꼬박 스크랩해왔던 팬이다. 그는 “그대로 묻히기엔 너무 아까운 시들이 많다”며 “때론 고단하고 팍팍하고, 찌든 삶의 냄새까지 느껴지는 게 최란주 시의 매력”이라고 했다. 역시 고인의 법원 동료이자 남편 윤대룡(70)씨도 힘을 보탰다. 아내가 떠난 휑한 집에서 고이 보관하던 원고 상당수가 이번에 빛을 봤다.

고인은 지리산 자락과 가까운 전남 구례 출신으로 1992년 법원 공무원이 됐다. 재판 준비와 조서 작성 보조, 경매 지원 등 복잡한 업무량과 업무 강도에 힘겨워했고, 늦깎이로 결혼한 뒤 여러 차례 임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0여 년 가까이 승진 시험에 도전했지만 연거푸 미끄러지면서 의욕 상실을 겪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료 직원들을 살뜰하게 챙기며 문학 모임을 이끌었고, 법원 내부 통신망과 소식지에 자작시를 올리며 삭막한 법원 분위기에 활력을 넣으려 애썼다. 신춘문예 당선작 ‘남쪽의 집수리’는 벌레 이름이자 보일러 상표인 ‘귀뚜라미’ ‘나비’를 소재로 등장시켜 자연의 정경과 난방 보일러를 놓기 위해 견적을 놓는 일상의 상황을 절묘하게 중첩·대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

윤대룡씨는 “아내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시의 소재로 멋지게 활용하는 재주가 뛰어났다”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한 시선을 가진 시인으로 사랑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고인은 딱딱한 법률 용어가 오가는 법정부터, 찰진 사투리로 시끌벅적한 시골 마을까지 다양한 풍경을 시로 그려냈다.

‘턱을 수술한 그녀가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사내를 사기죄로 고소한 그녀가 법정에서 눈물을 흘린다/사랑은 투자를 낳고 배신은 소송을 낳는다…(사랑)’

‘어느 날 당신의 삶이 경매된다면/당신은 파리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을 거다/한 곳이라도 더 걷게 해달라고/한 달이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한 달이라도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어느 날 당신의 삶이 경매된다면)’

‘느그 아부지가 하늘나라 감시롱 내 귓속에 수락폭포(구례에 있는 폭포)를 넣어놓고 갔나 부다야… 살아있을 적에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 허던 느그 아버지가 할 말이 너무 많응께 한꺼번에 나를 부른갑다야, 그게 이 폭포소리여!”(수락폭포 셋째 마당)

참석자들은 생전 원고를 카페 테이블에 펼쳐놓고 시인을 추억했다. 정 전 국장이 “성실한 공무원이자 시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고인의 숨결이 밴 작품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하자 윤씨는 “아내가 하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참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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