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지배 구조 걱정, 국민연금부터 하라

김신영 경제부 차장 2023. 2. 4.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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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로부터 자유로운 검증된 투자 전문가들에게
연금 맡기지 않으면 국민 신뢰 얻을 수 없다”
캐나다 국민연금 개혁 성공, 지배구조부터 먼저 바꿨다
2018년 3월 13일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본사. 오른쪽 건물이 국민연금공단, 왼쪽이 기금운용본부 건물이다. /김영근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금융위원회 업무 보고 때 ‘스튜어드십’이란 단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일상에서 흔히 쓰지 않는 이 말은 (직역하면) ‘집사(執事)의 자세’란 뜻이다. 남의 돈을 집사처럼 관리하는 연기금 등이 책임감 있는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뜻으로 요즘 쓰인다. 이날 대통령은 이른바 ‘주인 없는 기업’의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해 국민연금 의결권을 활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스튜어드십을 언급했다. 여당 인사들도 비슷한 발언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1000조원 가까이 쌓인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을 기업 활동 개선에 쓰자는 주장은 얼핏 그럴싸하게 들린다. 블랙록 같은 외국 자산운용사도 투자한 기업의 지배 구조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판에, 국민연금이라고 못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투자 업계의 한 전문가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국엔 사실 지배 구조가 엉망인 기업이 많다. 하지만 국민연금 지배 구조는 더 엉망이다.”

대통령과 여당은 KT·포스코 같은 주인 없는 회사의 경영진 선임 절차가 특히 문제여서 스튜어드십을 활용해 고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도 얼마 전 같은 발언을 했다. 그런데 정작 국민연금 이사장은 어떻게 뽑나. 아는 사람이 드물다. 김 이사장은 예금보험공사 사장에 취임한 지 1년도 안 돼서 무슨 명(命)을 받았는지 지난여름 갑자기 국민연금 이사장에 지원했고, 뽑혔다. 공고엔 분명 ‘국민연금 및 사회복지 분야와 관련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요건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줄곧 금융 분야에서만 일한 관료가 어찌 갔는지, 공무원들조차도 의아해한다. 웬만한 주인 없는 회사도 이 정도 주먹구구는 아니다.

기업 이사회의 중요한 가치인 다양성은 어떤가. 국민연금 운용 방침을 최종 결정하는 이사회 격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연금 이사장을 포함해 20명 중 6명이 정부 인사다. 게다가 복지부 장관, 국민연금 이사장 그리고 (또 한 명의 정부 인사인) 기획재정부 차관은 비슷한 또래의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선후배 사이다. ‘관치’ 논란 끝에 이들의 약 10년 선배인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 우리금융 회장으로 3일 내정됐는데, 지분이 약 8%인 국민연금이 다음 달 주주총회에서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을까. ‘모피아끼리 그럴 리가’라는 게 대체적 반응이다.

지난 2일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연찬회에 조규홍 복지부 장관(왼쪽)과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참석한 모습. 재정경제원 선후배 사이인 이 둘은 각각 국민연금 운용에 관한 최고 결정 기구인 기금운영위원회 위원장과 당연직 위원을 맡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측 위원들은 의욕도 저조하다. 위원회 활동이 가욋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섯 차례 회의 때 위원장인 복지부 장관은 두 번 참석하고 말았다. 나머지 정부 인사는 대부분 대리인을 보내거나 그냥 결석했다. 주인 없는 회사의 이사회는 거수기라고 비난받지만, 국민연금 위원들은 거수마저 하러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캐나다는 한국이 고민 중인 고령화·저출산에 대비한 연금 개혁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로 꼽힌다. 재무장관이었던 폴 마틴이 25년 전 연금을 수술해 고갈 위기를 막았다. 인기 없는 보험료 인상을 이끌어내면서 마틴은 운용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독립적 기구 ‘캐나다 연금 투자위원회’의 설립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연금 운용만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고 ‘수익률 하나만 본다’는 목표를 법에까지 명시해 연금을 굴리게 했다. 그 결과 파탄 직전이었던 캐나다 국민연금 수익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지난 5년 평균 수익률이 10%로 국민연금(8%)보다 꽤 높다.

캐나다의 국민연금 개혁 과정을 정리한 책 ‘미래를 고치다’ 서문에 마틴은 이렇게 썼다. “독립적인 운용 조직 설립은 거대한 연금을 경제 정책의 지렛대로 쓰길 바라는 정부가 매우 꺼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검증된 투자 전문가들에게 연금을 맡기지 않고서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우리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캐나다 국민연금은 매년 이사들의 경력과 전문 분야를 보고서에 상세히 공개한다. 위원회별 출석률, 거마비를 포함한 보수까지 실명으로 적혀 있다. ‘전문가들이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돈을 굴리고 있으니 믿고 맡겨 달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한국 국민연금은 어떤가. 연례 보고서엔 기금운용위원 이름조차 없다. 위원회를 소개하는 챕터를 몇 년째 ‘복붙’해다 쓰고 있으니 굳이 이름까지 안 적는 편이 용이할지 모르겠다. 사실 국민 기대치도 그다지 높지 않다. 지금 한국의 국민연금은 진짜 주인인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인사들이 연금의 소유자도 아닌 정부 뜻에 따라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이런 상태를 흔히 ‘나쁜 지배 구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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