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동규가 친구 김치수를 떠올리며 마신 술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3. 2. 4. 00:43 수정 2023. 2. 4.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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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지공다스 와인

술을 마실 만큼 마셨으면 그만 마시는 때도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쓴 적이 있다. 인간관계에도 만남과 이별이 있듯이 술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겠느냐고. 거창하게도 ‘애별리고’라는 말까지 가져와 썼었다.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이라는 뜻의 애별리고는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한 병의 술에 끝이 있듯이 삶에도 끝이 있고, 한 사람과의 관계에도 끝이 있듯이 술과의 관계에도 끝이 있는 것 아닌가. 그래, 그 편이 더 자연스러워.(…) 생로병사의 시간처럼, 술의 시간도 태어나 자라고 늙다가 결국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 『영롱보다 몽롱』)

프랑스 남부 론 지방에 있는 와인 생산지 지공다스에서 생산되는 와인. 주변보다 고도가 높아 힘이 있는 와인으로 유명하다. /지공다스 와인 공식 인스타그램

이렇게 썼던 것을 정정하고 싶어졌다.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누군가 나를 기억하며 내가 좋아하는 술을 마셔준다면, 나를 대신해 마셔준다면,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나 싶어서. 직접 마시지 못하더라도 그건 이별이 아니라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술을 마시는 내가 있고, 그는 술을 마시는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데, 어찌 마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건 그의 기억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싶고.

한 편의 시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다. “8년 전에 세상 뜬 친구 김치수/어젯밤 꿈에 나타났다./글 읽었어!/지공다스 한 병 내밀었다./마스크 없이.” 황동규 시인이 최근에 발표한 ‘코로나 파편들’이라는 시의 일부다. 나는 이 시를 읽고서 지공다스 와인을 한 병 사러 갔다. 전에 마셔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름은 익숙한 프랑스 론 지방의 와인을. 술을 책으로 배운 자로서 지공다스가 나오는 시를 읽고 지공다스를 마시지 않을 수 없어서.

울컥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날들에 대한 시를 발표하고 있는 노년의 시인이 8년 전 죽은 친구가 나오는 시를 썼다는 것. “글 읽었어!”라는 글 쓰는 사람들끼리의 인사를 나눴다는 것. 친구 생전에도 그랬으리라는 것. 8년 전에 죽어서 그런지 꿈이라 그런지 친구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 지공다스는 친구에게 각별한 술이었을 거라는 것. 둘이 지공다스를 마시기도 했을 거라는 것 등등이 순식간에 몰려왔기 때문에.

지공다스에는 이런 각주가 달려 있다. “비평가 김치수가 유학한 프랑스 론 지방 특산 와인. 대체로 가성비 높다.” 아마 시인이 달았을 각주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성비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걸까,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누구였을까, 부터 그가 프랑스에서 자주 지공다스를 마셨을 거라는 생각까지. 1940년생이니 아마도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프랑스에 머물렀을 그가 프랑스에서 마시던 ‘동네 와인’을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겹고도, 쓸쓸하구나라고도.

그는 프로방스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지공다스는 론 와인이니까 엄밀히 말해 ‘김치수가 유학한 론 지방 와인’은 아닌 것이다. 다만 론이 프로방스 옆 동네니까 프로방스에 비교적 론 와인이 흔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대개 값이 나가는 편인 부르고뉴 와인보다는 편하게 마셨을 거라는 생각도. 론에도 샤또네프 뒤 빠쁘나 콩드리유 같은 고가의 와인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치수는 프랑스에서는 한국을 그리워했을 것이고, 한국에서는 프랑스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움이란 필연적으로 거리가 발생해야 생겨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그리울 수도 있지만 이런 건 ‘시적 허용’이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와인 앤 모어에서 사온 지공다스를 땄다. 색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피노누아보다는 짙었고, 시라즈보다는 옅었다. 중간 정도의 색조. 냄새를 먼저 맡았다. 달콤한 과일 냄새가 났다. 베리류 과일이 농익어서 나는 그런 냄새가. 마셨더니 그리 달지 않았다. 탄닌이 느껴지는 편이었고 산미는 그다지 없었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고, 드라이했다. 그리고 스파이시했다.

일단 지공다스를 열어서 한 잔 마신 후 나는 불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불고기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불고깃감을 한 장씩 뗀 후 지공다스를 뿌려두었다. 양념을 더해 바로 구웠다. 그래서 지공다스와 불고기를 먹는데 이보다 불고기에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이 있을까 싶었다. 진판델이나 클라레 같은 좀 무겁고 달콤한 레드와 불고기를 먹었었는데 그보다 지공다스가 좋았다. 좀 더 가볍고 달콤함은 거의 없는 이 와인이. 은근한 품위가 느껴지는 이 와인이.

나는 그가 번역한 책 중에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과 마르트 로베르의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을 갖고 있다. 그는 이 책들의 역자 후기를 쓰면서 지공다스를 마셨을까? 오랜 고생을 끝냈으니 꼭 지공다스가 아니더라도 뭐라도 마셨겠지. “독자들의 질정이 있기를 기대하며, 이 책의 문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에 대한 흥미를 돋워주고 소설을 읽는 것이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정도로 절제하고 계시지만.

그르나슈와 시라즈, 무르베드르 품종을 섞어서 지공다스를 만든다고 한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지공다스는 라틴어로부터 왔다. 조쿤디타스(Jocunditas). 커다란 쾌락과 즐거움이라는 뜻이라고.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지공다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포도밭에 로마 2군단 병사들을 위한 위락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를 읽다가 지공다스를 마시다가 지공다스가 조쿤디타스에서 왔다는 것까지 알게 되자 지공다스의 맛에도 깊이감이 생기는 기분이다. 뭐랄까. 과하지 않다. 달지도 않고 산미도 약하고 탄닌이 느껴지는데, 텁텁하지가 않았다. 품위 있는 맛이랄까?

지공다스를 야금야금 마시면서 죽음과 삶에 대하여 생각한 며칠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내가 좋아한 술을 기억해줄까라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또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이가 좋아하는 술을 떠올려본다. 그이가 먼저 떠나게 되면 그이가 좋아하는 술을 마셔야 하니까.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을 때 한 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또 한 번. 그는 아직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지공다스 와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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