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모니터’처럼 틈새 시간 디자인, 삶의 사각지대 메워
POLITE SOCIETY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아껴 쓰지만, 잘 모르는 것은 시간 사이의 시간을 즐기는 방법이다. 이 짧은 시간의 틈새를 위해서 디자이너들은 여러 장치들을 심어 놓는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의 내부 공간과 같은 장소다. 런던 최초의 엘리베이터인 사보이호텔의 ‘붉은 승강기(The Red Lift)’ 내부에는 프렌치 엠파이어 스타일의 우아한 의자가 놓여 있는 걸로 유명하다. ‘승강하는 방’이라고 붙은 이 공간에서 이용객을 기다리는 의자는 마법처럼 기계를 작은 방으로 바꾼다. 내부 벽에 손으로 유화를 그려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을 주거나, 서재처럼 꾸며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느낌을 주는 예들도 있다. 짧게 층을 이동하는 동안 그 속에 머무는 시간을 채워주는 디자인이다. 그 숨겨진 시간을 찾아내고 틈틈이 쪼개진 시간의 조각과 그를 위한 환경을 즐길 수 있는 안목과 여유가 필요하다.
현대사회서 시간은 돈 만큼 큰 가치
화장실 디자인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공간에 비해서 하루에 점유, 사용하는 시간이 월등히 짧지만, 그 짧은 시간을 편하고 쾌적하게 보내는 것은 중요하다. 1980년대 이미 서울 방배동의 ‘마로니에 카페’ 여자화장실에 전화기(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다)와 화장대, 작은 소파가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Hawks) 야구장 레스토랑의 남자화장실에는 소변기 앞 벽면에 작은 모니터가 달려있다. 그 화면은 오늘의 증권시장, 어제 경기 스코어 등의 짧은 뉴스를 전한다. 보통 그저 벽만 바라보기 마련인 짧은 시간을 이용한 정보의 습득이다.
여행을 할 때 기차는 단지 어디로 가는 운송수단만은 아니다. 객실 자체가 하나의 목적지다. 특히 장거리 열차일수록 그렇다. 이 개념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로 유명해진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와 같은 호화열차에 잘 연출돼 있다. 19세기 탐험의 시대 정서를 재현한 ‘로보스 레일(Rovos Rail)’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아프리카의 자부심’으로 불리는 이 기차 내부에는 레스토랑, 라운지와 바는 물론, 야외 전망차나 고급 침실, 도서관 등이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단지 기차에 승차해서 목적지에 가는 개념이 아닌, 그 내부에 머무는 시간을 위한 배려다. 내가 내리지 않는 정류장에 기차가 쉬고 있으면 시간을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과거 새마을호 정차 시 대전역이나 동대구역에 잠시 내려 우동을 사먹던 추억은 이런 틈새의 시간을 이용한 짜릿함이었다. 물론 요즈음 KTX 환경에선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현대의 고속열차들은 이런 틈이 없이 빨리 달리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없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진국일수록 공적인 공간 잘 디자인
비행기 이륙 전, 기내 안전 비디오가 5분간 상영된다. 출장이나 여행을 자주 떠나는 사람들은 수십, 수백 번 시청한 지루한 영상이다. 약 10여 년 전부터 주요 항공사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이 비디오를 재미있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이용하기도 하고, 패션쇼를 보는 듯한 화려한 의상과 색채로 다양성을 도입했다. 이 영상들은 또한 국적기들이 주요 유적지나 관광지, 아름다운 자연을 소개함으로써 자국의 문화를 알리고 관광을 홍보하는 수단으로도 적절하다. 불과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고객의 쾌적함과 만족도를 높이는 서비스다.
내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리포트를 제출할 경우, 그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도 창의성을 요구한다. 즉 리포트 자체도 다양한 재료로 재미있게 디자인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영문학과의 리포트와 디자인 전공학과의 리포트 모양이 같을 수는 없다”는 논리다. 결과적으로 온갖 기발하고 창의적인 작품들이 탄생한다. 학생들끼리 서로 감탄하고 배우는 건 물론이다. 보드게임처럼 만든 리포트, 건축적 재료와 구조로 조립된 작품, 공간을 이용한 설치예술 등 마치 ‘연구과제의 할로윈 파티’를 보는 것 같다. 그 중 오래 전 한 학생이 제출한 리포트가 잊혀지지 않는다. 작성한 리포트와 함께 편하게 읽고 평가하시라고 베게와 담요, 그리고 돋보기와 조명이 첨부된 선물세트 바구니였다. 리포트를 읽을 교수의 시간을 디자인한 컨셉이었다.
일상에서 익숙하게 시간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틈새 역시 잘 이용한다. 공적인 공간을 잘 디자인해서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의 질을 높여주는 서비스는 선진국일수록 발달돼 있다. 이는 시간의 숨겨진 차원(Hidden Dimension)을 발견하고 삶의 사각지대를 채워 주는 개념이다. 누구에게나 제한된 시간이기에, 결국 잘 디자인된 공간을 인지하고 향유하는 습관이 삶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이 된다. 우리 일상의 틈새에 시간과 디자인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 오래전 나무를 심어 놓은 덕분에 누군가 오늘 그늘에 앉아 쉴 수 있다”는 워렌 버핏의 말처럼, 전문가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연구해서 제공하는 배려다. 그걸 발견하는 안목과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그 틈새의 디자인을 즐기는 여유만 갖추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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