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주군과 생사 겨룬 적 드문 김일성, 선전전엔 능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2〉
중공은 국민당에 비해 실속이 있었다. 동북 항일무장세력의 연합체였던 ‘동북항일연군’의 주축이 공산계열이었다. 1937년 여름, 국·공이 연합해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자 관동군은 ‘동북항일연군’이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 내지로 진출(入關)할 것을 우려했다. 대규모 소탕 작전을 벌였다. 4년간 계속된 관동군의 공세로 ‘동북항일연군’은 동북에서 자취를 감췄다. 명성을 떨쳤던 지휘관들도 거의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잔존세력들은 동북에서 갈 곳이 없었다. 소·만 국경을 넘었다. 소련은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된 애물단지들을 반기지 않았지만 내치지도 않았다.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주보중)과 리자오린(李兆麟·이조린)이 여단장과 부여단장인 외국인 혼성여단(88교도여단)에 편입시켰다.
김, 한반도서 분탕질 후 만주 복귀 반복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자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도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이틀 후, 여단 야영지에서 반격 선서식을 거행했다. 저우바오중과 리자오린의 연설에 이어 김일성이 연단에 올라 기염을 토했다. “동북항일연군 전사들이 연합해 반격할 날이 도래했다. 항일전쟁 최후의 승리를 우리 손으로 탈취하자.”
8월 27일 저우바오중이 ‘88여단’ 소속 중국인 간부들을 소집했다. “환자, 임산부, 신체 허약자, 아동, 소수의 유수(留守) 인원을 제외한 모든 대원은 귀국을 준비해라.” 중공도 ‘동북위원회’를 발족시켜 소련군과 협상했다. 소련에서 돌아올 ‘동북항일연군’ 전사들과 연합해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 중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파견할 공작조 57개를 편성하기로 합의했다. 저우는 공작대의 임무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동북으로 돌아가기 전에 국민당과의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적어도 산속에서 두 차례 정도 유격전을 치를 각오가 필요하다. 각 공작조에 편성된 대원들은 동북 도착 후 소련 군복을 착용한 채 소련 위수사령부에서 공작에 참여한다. 공작조 조장은 임무가 막중하다. 소련군 주둔지 위수사령부 부사령관도 겸직해야 한다.”
동북항일연군,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명
‘동북인민자위군’은 현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건군과 당 조직도 순조로웠다. 1개월 만에 4만명으로 늘어났다. 무장은 소련군이 제공한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군대, 경찰이 사용하던 총기와 박격포로 충당했다. 국민당은 항일전쟁 기간 동북을 등한시했다. 군대를 파견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다. 국민당 정부와 우호조약 체결한 소련 정규군이 동북에 몰려오자 만주국 관리와 경찰 출신들은 내놓고 국민당을 지지했다.
국민당군의 동북 진출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이 동북의 대도시를 질주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동북이 국·공 양당의 전쟁터로 변했다. 동북 최대의 도시 선양(瀋陽)에 입성한 국민당군의 지휘관은 항일명장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이었다. 첫 번째 전투가 선양 인근의 슈수이허(秀水河)에서 벌어졌다. 국민당군은 사기충천했다. 린뱌오(林彪·임표)가 슈수이허에 웅크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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