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호텔에 돈 벌러 갔어요

2023. 2. 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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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일이 있어 지방 호텔에서 외박을 했다.

아이를 친정 부모님에게 맡기고 나 혼자 갔는데, 일 때문이기는 해도 아이 없이 나 혼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룻밤 잔다는 것이 출산 후 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나는 잔뜩 들떴다.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길었으나 그것들을 떠올리면서 얻은 결론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일 관련하여 누군가를 만나야 했는데 내가 초면인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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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일이 있어 지방 호텔에서 외박을 했다. 아이를 친정 부모님에게 맡기고 나 혼자 갔는데, 일 때문이기는 해도 아이 없이 나 혼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룻밤 잔다는 것이 출산 후 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나는 잔뜩 들떴다. 뭘 할까. 바닷가를 산책할까. 전망 좋은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까. 노래방에 가서 노래나 실컷 부를까.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길었으나 그것들을 떠올리면서 얻은 결론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호텔방에서 빈둥거리며 누워 있었다. 방은 따뜻하고 노트북으로 틀어놓은 음악은 감미롭고 창가에 놓인 탁자에는 초콜릿 비스킷과 커피가 있으니 이미 완벽한데, 화룡점정으로 창밖에는 탁 트인 바다가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며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평화로운 지복의 순간을 깬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시어머니였다. 내가 집을 비운 것을 알고 계셨던 어머니가 아이에게 안부 전화를 하셨는데, 녀석이 고자질하듯 말했단다. 엄마는 집에 없어요. 호텔에 돈 벌러 갔거든요. 돈을 벌려면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와야 한대요. 시어머니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세부가 생략되었을 뿐 핵심은 내가 일러준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내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는 돈 벌러 호텔에 갔다’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편견이, 고정관념이 우리를 웃게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낮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 관련하여 누군가를 만나야 했는데 내가 초면인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름뿐이었다. 순정만화 여자 주인공의 이름으로 흔히 쓰일 법한, 전형적으로 예쁜 이름이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다는 그녀를 찾지 못해 헤맸는데, 찾고 보니 그는 체격이 크고 인상도 험한 남자였다. 이름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는다며 그는 개명할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사람들과 이름 때문에 웃게 되는 것이 좋고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도 좋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용건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내가 아이 이야기를 했는데 집중해서 듣고 있던 그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 여자아이였어요? 전 여태 남자아이를 상상하고 있었네요. 태권도를 배운다고 하셔서. 나도 사람 좋게 웃었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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