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책방에 누추하신 손님이 [삶과 문화]

2023. 2. 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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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와서 사방이 조용한 날,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젊은 엄마가 들어왔다.

그러자 엄마는 겸연쩍게 웃으며 책을 덮었고, 아이는 엄마 눈치를 보며 책을 덮었다.

책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음료를 마시며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 앞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스스로 책을 좀 아는 엄마라고 한껏 교양을 부리지만, 아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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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밤새 눈이 와서 사방이 조용한 날,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젊은 엄마가 들어왔다. 오래 책을 둘러보다 각각 음료 한 잔을 시킨 그들은 책 한 권씩을 집어 들었다. 아이는 의자에 앉아 두꺼운 책 표지를 딱 젖히고서는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맘먹고 책을 읽을 요량이었다. 음료를 만들다 말고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희는요. 책을 구입해서 보셔야 해요. 책이 낡아지면 판매를 할 수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겸연쩍게 웃으며 책을 덮었고, 아이는 엄마 눈치를 보며 책을 덮었다. 책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음료를 마시며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다.

"책 보고 싶은 거 있어요?"

아이가 대답했다.

"없어요."

아니, 조금 아까 보려고 했던 책은 보고 싶은 책이 아니었나? 엄마는 다시 말했다.

"꼭 보고 싶은 책이라면 사줄게요."

그런데 아이는 그만 됐다고 했다. 안 봐도 된다고. 그러자 엄마는 마치 자신의 할 일이 끝난 양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책 냄새나 실컷 맡고 가자."

그들은 나름 책 한 권씩을 골랐던 터였다. 심지어 엄마가 고른 책은 내 산문집이었다. 그런데 구입해 읽어야 한다는 말에 읽고 싶은 책이 없어진 것이다. 엄마는 휴대폰을 보며 아이에게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

"책을 만지면 안 돼요. 조심해서 걸으세요. 흘리지 말고 드세요."

휴대폰이 없는 아이는 엄마 눈치를 보며 몸을 배배 꼬다 음료를 홀짝거렸다. 엄마와 아이가 서로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조금은 짐작됐다. 엄마는 한껏 교양 있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책을 잘 안 읽어요. 우리 애는 그래도 제가 책을 좀 읽히거든요. 인터넷으로 좋은 책을 사주니까요. 제가 책 관련 일을 했었거든요. 그러니 아무래도 다른 엄마들보다는 조금 책을 고르는 안목도 있고요. 엄마들도 책을 잘 모르잖아요."

그의 말을 듣느라 얼굴을 보니 마스크를 벗은 입술이 붉은 립스틱으로 번들거렸다. 팬데믹 덕분에 사람들 얼굴을 제대로 볼 일이 없었다. 더욱이 저렇게 진한 화장이라니. 나는 붉은 립스틱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나는 그의 입술을 보며 말했다.

"아이들이 직접 책을 골라야 책을 더 볼 텐데요. 그래야 나중에 책을 찾아 읽고, 또 나중에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 책을 골라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다시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우리 애는 책을 좀 많이 읽으니까 그래도 다행이지요."

조용한 책방에 찾아든 '누추하신 손님'이 나는 재미있었다. 그러나 더 말을 섞지는 않았다. 아이 앞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스스로 책을 좀 아는 엄마라고 한껏 교양을 부리지만, 아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왕 구불구불 시골책방까지 찾아왔으니 책 한 권을 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책도 좀 팔고. 아이에게 그것은 또 얼마나 큰 추억이 되겠는가. 돌아가 엄마와 함께 이곳에서 구입한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서로에게 추억이 되어 어느 힘든 날, 슬쩍 꺼내면 위로가 될 텐데.

나에게 한없이 '귀한 책방'에는 가끔 이렇게 '누추하신 손님'이 온다.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와 스스로 누추해지는 손님들도 있는데 그들을 보는 것도 심심할 때는 즐겁다.

※이번 칼럼 제목은 숀 비텔의 '귀한 서점에 누추하신 분이'에서 따옴.

임후남 시인·생각을담는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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