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입춘은 가장 '뜨거운' 절기다
아이가 처음 일어서는 것처럼
봄이 일어나는 것을 표현한 것
땅밑 얼음을 녹이고 올라오는
1년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절기
왜 '立春'이라 했을까? 출가 전 직장 다닐 때 회사 대표가 칠판에 '入春大吉'이라 쓴 적이 있다. 그 대표뿐만 아니라 입춘을 '入春'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을 성싶다. 입춘을 봄이라는 계절로 들어가는 날로 보는 것도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김세경의 시 '입춘'은 입춘에 설 립(立) 자를 쓴 이유를 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입춘은 한 아이가 처음으로 일어서는 것처럼 봄이 일어서는 것이다. 시인은 누워 있던 "땅이 일어선다"고 표현하고 있다. 땅(계절 또는 아이)이 "겨우내 젖 물고 있더니/ 아장아장 걸어보겠다고/ 지나는 바람의 치마폭 붙잡고" 일어선다. 세상(가족들)은 박수를 치면서 외친다. "섰다 섰다 섰다".
그래서 들 입(入) 자가 아니라 설 립(立) 자가 되는 것이다. 아이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서야 할 때를 알고 어느 날 벌떡 일어선다. 계절도 마찬가지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아직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는데도 때가 되면 저 아래쪽에서부터 힘찬 기운을 밀어올린다. 벌떡 일어선 아이가 한 번도 배우지 않은 걸음마를 아장아장 완수하듯이, 입춘을 지난 계절은 늙은 겨울의 파상공세를 연쇄적으로 물리치면서 힘차게 전진한다.
나는 2월의 숲속으로 산책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2월의 숲속은 혹한이어도 희망이 넘친다. 얼음장 속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세상의 어떤 악기도 흉내 낼 수 없는 신비한 음악이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시(詩)다. 가지 끝의 겨울눈(winter bud)은 이미 뜨거워서 눈을 맞으면 금세 녹여버린다.
오늘도 구름산을 오르니, 어제 만났던 오색딱따구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다. 어떤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는 전동드릴이 벽에 구멍을 뚫는 소리 같다. 까치, 까마귀, 참새, 직박구리, 개똥지빠귀, 뻐꾸기, 소쩍새 등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나는 가끔 걸음을 멈춰서서 그들의 충실한 관객이 되어본다.
다람쥐와 청설모가 지그재그로 이 가지 저 가지를 오르내리다가 숨겨놓은 도토리를 찾아 낙엽을 뒤져본다. 또 허탕이다. 도토리는 땅속에서 깊은 선정에 잠겨 있다가 날씨가 풀리면 은근슬쩍 세상 밖으로 아이 같은 새싹을 내놓을 것이다.
절기와 명절 중에서 새해의 시작과 관계된 날은 동지, 양력 1월 1일, 설날, 그리고 입춘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일리가 있지만, 계절의 흐름으로 보면 봄이라는 계절의 새 기운이 일어서는 입춘이야말로 새해 첫날에 가장 합당하다. 달력에는 양력 1월에 천간(天干)·지지(地支)가 바뀌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 천간·지지가 바뀌는 날은 입춘부터다. 2023년의 경우 원칙적으로 계묘년은 입춘날인 2월 4일부터인 것이다.
겨울을 늙은 장군에 비유한다면, 이른 봄은 어린아이에 비유할 수 있다. 특히 입춘은 김세경의 시에서처럼 이제 막 일어서서 첫걸음을 떼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으니, 입춘은 1년 중 가장 희망적인 날이어서, 입춘날에 우리는 새봄의 희망사항을 대문에 멋들어지게 붙인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이 되니 크게 길할 것이요, 밝은 기운이 서니 경사가 많으리로다.
우리들의 당찬 희망을 담은 입춘은 저 땅 밑에서 얼음을 녹이고 올라오는 가장 뜨거운 절기다. 눈이 많이 온 2월의 구름산에서 나는 입춘보다 더 큰 희망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구름산 능선길을 누군가가 깨끗하게 쓸어놓았던 것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안전하기를 바라며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두터운 얼음장을 녹이는 희망 넘치는 '따뜻한' 입춘첩(立春帖)이다.
[동명 스님 광명 금강정사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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