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빌라왕 전세 사기, 무엇이 부추겼나

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 2023. 2. 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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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빌라왕 전세 사기 사건의 본질은 빌라의 전셋값이 매매가격보다 높다는 데 있다. 시세 3억원쯤으로 추정되는 빌라가 전세 3억원에 내놔도 들어올 세입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3억원쯤 하는 빌라를 전세 3억원을 끼고 내 돈 한 푼 없이 살 수 있고, 흥정만 잘하면 2억5000만원에 산 빌라를 3억원에 전세로 내놓을 수 있으니 도장 몇 번만 찍으면 앉은자리에서 5000만원이 생기는 신종 사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빌라에 전세금보증보험 가입을 허용해준 주택보증공사의 이상한 정책이 한몫 거들긴 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빌라 전셋값이 집값보다 비싸다'는 데 있다. 위치도 좋고 집도 깨끗하니 전세 3억원이면 합리적인 전세가라고 판단하는 임차인이 수없이 많은 그 빌라가 왜 가격은 3억원에 못 미치는 것일까. 그건 우리나라의 독특한 주택공급 정책과 무주택자에 대한 과도한 우대 때문이다.

9월28일 기획재정부가 '전세사기 피해 방지방안' 후속조치로 임차인 피해예방, 피해지원·전세사기 혐의자 단속·처벌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국세분야 전세사기 피해 방지방안'을 발표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 한 공인중개업소 앞. ⓒ연합뉴스

우리나라는 분양가 심사를 통해 대도시 새 아파트를 시세보다 매우 저렴하게 분양하라고 압박하는 제도가 있다. 아파트를 분양가에 매수할 수 있다면 앉은자리에서 최대 십수억원의 차익이 생기는 구조다. 이런 제도는 집값 상승기에 시중에 나와 있는 비싼 집을 사지 말고 기다려보라는 메시지를 무주택자에게 던진다. 그게 집값을 잡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정부는 이런 손쉬운 방법을 즐겨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로또 아파트'라는 말이 있고 '아파트에 당첨됐다'고 표현한다.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시기에는 어김없이 정부가 분양가 상한제를 들고나오고, 무주택자들의 로또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분양가를 시가보다 훨씬 더 낮게 억누르기 때문에 청약통장을 잘 유지하면서 점수를 쌓고 있으면 이런 로또 당첨 같은 기회가 온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무주택자라는 신분을 매우 오랜 기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집을 매수했던 전과(?)가 있으면 이런 로또 구매 대열에서 강제로 밀려난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집으로 돈을 벌려면 일단 인생 첫 집이 분양 아파트가 돼야 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빌라 같은 걸 사서 거주하다가 아파트를 구입하려고 하면 정부가 제공하는 특혜는 못 받는다. 그러니 돈이 좀 있는 고소득자들은 기를 쓰고 무주택을 유지하려고 한다. '빌라는 사면 안 된다'는 말이 우리나라 주택시장에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구조도 거기에 있고, 빌라 가격이 전셋값을 밑도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집을 구매하면 전과자 또는 2등 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빌라는 아무도 사려 하지 않고, 소득 낮은 젊은이들이 전세로만 거주하려고 하니 아무리 살기 좋고 위치도 좋은 빌라라도 매우 저가에 거래되는 것이다. 빌라왕 전세 사기는 이런 환경에서 싹을 틔운다. 위치 좋은 곳에 나름 건축비도 꽤 들여 좋은 빌라를 지어놓아 봐야 같은 건축비가 들어간 아파트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가격에 거래되다 보니 아무도 땅값 비싼 도심에서 낡은 빌라를 사서 부수고 새 빌라를 짓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빌라는 죄다 낡아만 가고 어쩌다 새 빌라가 들어서면 전셋값은 부르는 게 값이 된다. 그러나 그런 빌라를 매수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니 빌라 사기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왜 신혼부부들이 3억원짜리 빌라를 사서 예쁘게 꾸미고 살다가 4억원에 팔고 돈을 좀 보태 5억원짜리 빌라로 옮기고, 그다음에 그 빌라를 팔아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는 계획을 대한민국에서는 나쁜 일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에게 새 아파트를 값싸게 분양받을 기회를 박탈하는가.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볼 일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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