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앞·이태원광장 극우보수단체가 ‘선점’
시민분향소, ‘추모 방해용’ 신자유연대 현수막에 포위
‘평화의 소녀상’(평화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이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옛 일본대사관 도로 건너편에 있다. 소녀상은 현재 경찰 펜스에 둘러싸여 있다. 극우단체들이 2020년 6월부터 소녀상 앞에서 집회신고를 선점하기 시작하면서다. 이에 따라 세계 최장기 집회인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수요시위)도 28년 만에 처음으로 소녀상 앞 집회자리를 빼앗겼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서울 용산 이태원광장의 시민분향소도 극우단체의 표적이 됐다. 분향소 바로 옆에 극우단체가 천막을 치고 상주한다. 추모를 방해하고 정치적 색채를 담은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 분향소를 가리고 있다.
“수요시위 방해 목적으로 조직된 것” 수요시위는 1992년 1월 8일 처음 시작했다. 이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매주 수요일 낮 12시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개최됐다. 지난 2월 1일까지 모두 1581차례 열렸다.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1000차 수요시위를 기념해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소녀상 앞 도로는 일명 ‘평화로’라고 불렸다. 수요시위는 평화로에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수요시위는 2020년 6월 24일 처음으로 소녀상 앞에서 열리지 못했다. 신자유연대 등 극우단체가 집회신고를 통해 자리를 선점한 탓이다. 당시 극우단체는 집회에 “28년 만에 수요시위 장소를 우리가 빼앗았다”라고 했다. 경찰은 종로구청의 시설보호 요청에 따라 소녀상 주변에 펜스를 설치했다. 이들 단체가 소녀상 철거 등을 주장하면서 소녀상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코로나19 거리 두기 강화로 집회가 금지되면서 수요시위는 한동안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 형태로 진행됐다. 이때는 소녀상 앞에서 가능했다. 그러다 2021년 11월 거리 두기가 완화돼 1년 4개월 만에 대면으로 개최됐다. 신자유연대 등이 다시 선순위 집회신고로 소녀상 앞을 차지했다.
수요시위는 소녀상 주변을 전전해야 했다. 소녀상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약 30m 떨어진 연합뉴스 사옥 앞에서 열렸다. 이마저 다른 극우단체가 선점하면서 30m 더 떨어진 서울국세청 옆 인도까지 밀려나기도 했다. 수요시위를 주최하는 정의기억연대 관계자는 “우익단체들이 365일 밤낮 경찰서에 상주하며 2~3명이 6~7개 단체의 집회신고를 하고 있어 평화로 모든 집회장소의 1순위를 가져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 2월 1일 수요시위는 소녀상에서 왼쪽으로 약 30m 떨어진 서머셋팰리스서울 호텔 앞에서 열렸다. 이곳도 극우단체가 먼저 신고를 한 곳이지만 실제 집회를 개최하지 않아서 가능했다. 같은 시각 반일행동은 소녀상 앞에서 ‘소녀상 사수 수요문화제’를 개최했다. 이곳도 신자유연대가 선순위 신고를 한 장소다. 다만 반일행동은 2015년 12월 28일부터 한·일의 ‘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주장하며 천막 농성을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2020년 6월 23일에는 신자유연대의 소녀상 점거를 방지하기 위해 소녀상에 몸을 묶고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극우단체들도 일제히 낮 12시에 집회를 시작했다. 소녀상 바로 왼쪽에선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이 “위안부 사기극의 상징, 소녀상을 철거하라” 등을 주장하며 집회를 했다. 연합뉴스 사옥 앞에선 엄마부대 등도 같은 취지의 집회를 열었다. 길 건너편에선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와 국민계몽운동본부가 마찬가지 내용의 현수막을 펼쳐놓았다.
연합뉴스 사옥 앞에서 집회를 하던 엄마부대는 5분 만에 집회를 마치고 소녀상 옆 집회에 합류했다. 한 참가자는 지나가는 시민들을 향해 “위안부는 끌려간 게 아니다. 끌려갔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경찰은 충돌 방지를 위해 펜스 등 질서유지선과 차량을 동원해 양쪽 진영의 집회를 분리했다.
이날 반대집회를 개최한 극우단체들은 모두 지난해 1월 출범한 ‘위안부 사기 청산연대’라는 연합체 소속이다. 청산연대 소속 4명은 지난해 6월 독일 베를린에 있는 소녀상 앞에서 원정 시위를 벌여 국내외에서 논란이 됐다. 일본 언론은 이들을 두고 소녀상 철거를 추진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뜻밖의 원군’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신자유연대 명의로 소녀상 옆에 집회신고를 내고 있지만, 이들이 신자유연대로부터 위임을 받아 집회를 열고 있다고 한다. 극우단체 측은 “2월 15일부터는 반일행동이 있는 소녀상 앞에서도 집회를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극우단체의 집회가 ‘알박기 집회’ 성격을 띠고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인권위는 지난해 1월 수요시위가 온전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하라고 서울 종로경찰서장에게 긴급구제를 권고했다.
인권위는 우선 수요시위가 세계사적으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운동으로 의미가 크다는 점을 짚었다. 나아가 “단순히 보호받아야 할 두 개의 집회가 같은 장소에서 이뤄질 때 조정하는 문제로 접근할 게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고 불의에 대해 책임을 구하는 세계 최장기 집회에 대한 보호 방안 마련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이어 극우단체의 집회가 오직 수요시위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의견이 다른 집회를 주변에서 개최하는 것 자체를 무조건 방해로 볼 순 없지만, 극우단체는 수요시위의 내용과 상반되는 입장을 평화롭게 표명하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근거로 극우단체가 ‘위안부’ 피해자 가면을 쓰고 피해를 거짓 주장했다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한 점, 피해자를 성적으로 모욕하는 발언 등 모멸적인 방식으로 진행을 한 점 등을 들었다. 또 대포 소리를 크게 틀며 “돌격하라”는 소리와 함께 수요시위 쪽으로 달려가는 위협적인 행위를 한 점, 일부 수요시위 진행 시간대에 집회신고로 장소만 선점하고 실제론 집회도 개최하지 않은 점 등도 고려했다.
정의연 관계자는 “이후로도 바뀐 것은 없다”고 했다.
정의연 등 수요시위 참가자들은 ‘위안부피해자법’ 개정안의 통과를 촉구한다.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1월 대표발의한 법안이다. 개정안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부인·왜곡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금지한다. 신문, 방송이나 출판물, 집회 및 기자회견, 온라인 등을 통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단 ‘학문 연구, 예술적 창작 목적을 위한 행위이거나 이와 유사한 목적을 위한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
김 의원은 “고령화된 피해자나 유족 등이 형법이나 정보통신망법 등을 통해 권리피해 구제와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피해자의 인권침해와 명예훼손 행위를 더욱 강력하게 금지할 필요가 있다”라며 이유를 밝혔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피해자에 대한 왜곡들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개정안의 취지에 공감한다”라며 “법이 개정되면 실익과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추모감정 훼손, 접근금지해야” 서울 용산 이태원광장에도 2018년 7월부터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소녀상 바로 옆에는 신자유연대가 설치한 천막이 있다. 신자유연대는 이곳에 집회신고를 내고 상주하고 있다. 광장은 지난해 12월 14일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가 마련된 곳이다. 경찰은 두 장소를 펜스로 분리해 놓고 경력을 배치했다.
지난 2월 2일 시민분향소 주변은 신자유연대가 걸어놓은 현수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국민에게 더 이상 슬픔을 강요하지 말라’ 등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내용이다. ‘이재명 상습 거짓말쟁이 구속하라’, 특정 단체를 향해 ‘남의 죽음 위에 숟가락 올려 정치선동질하는 OO 꺼져’ 등도 적혀 있었다. 특정 유가족의 얼굴과 함께 정치적 편향성이 있다는 취지의 현수막도 걸었지만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분향소 뒤편에도 신자유연대의 빨간 천막이 있었다. 광장으로 들어서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으면 이곳이 분향소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협의회) 측은 분향소를 설치하는 날부터 신자유연대가 줄곧 추모를 방해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신자유연대의 집회를 두고 “현행법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협의회는 지난해 12월 29일 신자유연대와 김상진 대표를 상대로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서부지법에 제기했다. 협의회는 법적으로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추모감정을 신자유연대가 모욕적 발언 등으로 방해한다고 밝혔다. 반면 신자유연대 측은 유가족을 조롱하거나 비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지난 1월 17일 심문을 진행한 뒤 양측에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협의회의 대리인인 하희봉 변호사는 두 차례에 걸쳐 참고서면을 재판부에 냈다. 유가족 측은 추모감정을 이유로 영화의 일부분을 삭제하는 내용의 상영금지 가처분 결정이 2005년 1월 내려진 적이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재판부가 추모감정이 침해됐다는 이유로 접근금지 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례가 있는지를 요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형법에는 ‘장례식 방해죄’가 있다. 법 제158조는 장례식, 제사, 예배 또는 설교를 방해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도록 한다.
협의회는 분향소가 설치된 지난해 12월 14일부터 25일까지 확성기, 스피커, 고성 제창 등으로 훼방을 놓은 목록과 증거도 냈다. 앞서 언급한 문제의 현수막 사진도 제출했다. 협의회는 “신자유연대가 추모감정을 훼손할 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특정 정치세력에 편향돼 있다는 인상을 가지게 함으로써 유가족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했다.
협의회의 요구는 신자유연대가 분향소에 출입하거나 접근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분향소 반경 100m 이내에서 확성기나 앰프 등을 이용해 방송하는 행위, 고성의 구호로 제창하는 행위, 팻말·벽보·현수막을 게시하는 행위 등을 금지해 달라고도 재판부에 요청했다. 협의회는 “이를 통해 유가족의 인격권을 훼손하고 분향소의 평온을 해치는 행위를 못 하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신자유연대가 분향소 주변에 상주하면서 방해 분위기를 조장한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지난 1월 17일 시민분향소에서 만난 한 지킴이는 “이날 아침에는 누군가 유가족 측에서 걸어놓은 현수막을 칼로 찢는 일이 발생했다”라고 전했다. 지난 2월 2일 만난 다른 지킴이도 “신자유연대의 방해는 가처분 제기 이후 다소 줄어든 면이 있지만, 여전히 새벽에 어떤 분이 와서 난동을 부릴 때도 있다”라고 말했다.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신자유연대의 행위는 추모를 방해하기 위한 명백한 집회 방해 행위임에도 경찰은 ‘신고된 집회’라는 이유만으로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현재의 법과 제도로 해결하기 어렵다면 정치적으로라도 해결을 해야 하는데 대통령실과 행정안전부는 사실상 방치를 하고 있다”라며 “유가족과의 면담에서 신자유연대의 집회장소 변경을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던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공직자들의 무책임이 2차 가해와 혐오를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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