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원에 낙찰된 고서… 인류가 부여한 가치는 무엇인가[북리뷰]

2023. 2. 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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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더비가 사랑한 책들
김유석 지음│틈새책방
연매출 9조원 경매업체 소더비
초기엔 고문서·고서 거래 주력
520억 신기록 美 헌법 사본 등
11개 물건의 역사적 가치 분석
과거부터 중요시해온 관념 소개
1958년 소더비 대표이사로 취임한 피터 윌슨이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역사 저술가 김유석의 ‘소더비가 사랑한 책들’은 소더비 경매에서 찾은 책과 고문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게티이미지뱅크

1957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고흐의 그림들을 공개 감상하기 위한 자리에 초대받았다. 전시 공간은 박물관도 아니고, 미술관도 아니었다. 여왕을 초대한 곳은 런던 소더비 경매장이었다. 여왕의 관람 덕분에 뉴욕 금융 거부 윌리엄 와인버그의 유산을 판매하는 경매 행사는 품격을 얻고, 큰 관심을 끌면서 현재 가치 100억 원에 달하는 낙찰가를 기록했다.

역사 저술가인 김유석의 ‘소더비가 사랑한 책들’에 따르면, 와인버그 경매는 경매의 역사를 바꾸었다. 시장판에 가까웠던 경매가 정교히 기획된 고급 이벤트, 즉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명사들이 즐기는 파티처럼 변화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소더비는 고흐, 피카소, 몬드리안 등의 작품 거래를 주도하는 최고의 미술품 경매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연매출액 9조 원에 달하는 소더비는 크리스티와 함께 세계 경매 시장을 양분한다. 1744년 이 회사를 창립한 사람은 런던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던 새뮤얼 베이컨이다. 아일랜드 정치인 존 스탠리가 남긴 서적 경매로 큰 재미를 본 베이컨은 주력 분야를 책 경매로 옮겼고, 사업을 물려받은 새뮤얼 소더비도 마찬가지였다. 1913년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다루기 전까지 소더비의 주력 분야는 고문서·고서 경매였고, 이는 1950년대까지 줄곧 이어졌다. 한마디로, 소더비를 거친 주요 물품 중에는 서적이 미술품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 책은 나폴레옹 장서, 뉴턴 노트, 구텐베르크 성서, 마그나카르타, 미국 헌법 사본 등 소더비 경매에 올랐던 책이나 문서 중 11가지 주요 사례를 다룬다. 오래된 물건이라고 다 가치가 높은 건 아니다. 희소성이나 역사적 영향력이 있을 때 물건의 가치가 커진다.

희소성은 누가 언제 만들었느냐, 누가 소유했느냐, 어떤 사건과 관련 있느냐 등 물건의 이력에 따라 정해진다. 같은 책이라도 나폴레옹 장서는 가치가 높다. 볼네 백작의 ‘이집트와 시리아 기행’은 베스트셀러로 흔한 책이었으나, 독서광 나폴레옹이 읽으면서 페이지마다 자필로 수정하고 메모했기에 가치가 높아졌다. 유명인의 장서는 새 책 같은 헌책보다 사용 흔적이 많은 책일수록 가치가 더 커진다. 경매로 옛 물건을 산다는 것은 그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자기 소유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그리스·로마의 조각과 건축,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품 확보 경쟁에 수시로 뛰어들었다. 그 의미와 기억을 소유해 자기 나라가 유럽 문명의 정통 계승자임을 천명하려는 의도였다. 1882년 소더비 경매에 보티첼리가 직접 삽화를 그린 ‘신곡’이 올랐을 때, 영국과 독일이 벌였던 치열한 문화 전쟁은 이 사실을 잘 드러낸다.

책은 물건이면서 동시에 사유이기도 하다. 책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행동을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책의 가치는 단지 희소성뿐 아니라 그 역사적 영향력에 따라 정해진다. 저자는 오래된 책의 가치를 종교와 민주주의 두 차원에서 추적해 보여준다.

‘잔 드 나바르의 기도서’는 중세 채색 필사본의 정수로, 1919년 경매에 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란 호평을 받았고, 2013년 무려 150억 원에 낙찰된 ‘베이 시편집’은 복음 전파라는 청교도적 소명을 품고 힘겹게 가져간 인쇄기로 제작한 미국 최초의 인쇄본이다. 구텐베르크의 ‘성서’ 등과 더불어 이 책들은 신에게 바쳐진 책들이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2007년 약 250억 원에 낙찰된 ‘마그나카르타’는 근대 의회주의와 법치주의의 기원을 알리는 핵심 문서이다. 그런데 1215년 존 왕과 영주들이 모여 서명한 장소에 있는 기념비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 세웠다. 잊힌 문서에 가까웠던 이 문서를 되살려 독립 근거와 민주주의 기틀로 삼은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인권과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가치가 있다. 2016년 약 26억 원에 팔린 ‘노예 해방 선언문’ 인쇄본, 2021년 약 520억 원에 낙찰되어 역사상 가장 비싼 문서가 된 미국 헌법 사본 등은 그 증거다. 소더비가 사랑한 책들은 역사를 긴 호흡으로 보았을 때 인류가 진정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알려준다. 352쪽, 2만1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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