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기자의 러셀 신고식 덕태산] 눈밭에서 1박2일. 나는 인간 제설차였다

조경훈 2023. 2. 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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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in 덕태산

"러셀 산행 다녀와라."

월간<山>에 들어와 받은 첫 업무지시.'러셀Russel'을 검색한다. '제설차를 만든 미국 제조회사의 이름을 딴 등산 용어로, 우리말로는 눈길 뚫기, 눈 다지기, 눈 헤쳐 나가기, 제설 작업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눈 쌓인 산에 몇 번이나 가봤을까. 그것마저도 누군가가 다져놓은 길을 따라갔다. 머릿속에 몇 가지 물음표가 떠오른다.

'어디로 가지? 얼마나 힘들까? 또 얼마나 추울까?'

목적지가 정해졌다. 덕태산과 선각산. 금남호남정맥이 흐르는 진안고원의 숨겨진 오지 산이다. 떠나기 전날 밤 멀뚱멀뚱한 눈으로 덕태산을 검색한다. '1,000m급 정상, 원점회귀 가능, 멋진 폭포, 오지 산 그리고 맛있는 흑돼지.'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나 같은 초보는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해야 한다. 이번 산행은 성균관대 산악부 출신 한효희·박기완 선배와 함께한다. 초보기자의 가이드로선 제격이다. 러셀 산행은 엄청난 재미만큼 위험도 가득하다.

산행하기 전 주린 배를 채우고자 백운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허름한 중식당에 들어간다. 편의점 하나 없는 마을에 터줏대감처럼 서 있는 중국집. 달콤 짭짜름한 짜장 소스와 바삭바삭한 탕수육의 조합이 산행의 긴장감을 잠깐 잊게 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산행의 시작점 백운동계곡으로 향한다.

얼굴 높이까지 자란 산죽이 길을 막는다.

운전하던 한효희 선배가 현수막을 보고 놀란다. '산림치유원 공사로 입산을 제한하오니' 날벼락이다. 제갈량을 찾아간 유비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3시간 동안 차를 몰고 달려왔는데 입산금지라니.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곳까지 들어간다. 목적지인 백운동계곡 주차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컨테이너와 높은 벽이 우리를 맞이한다. 진퇴양난. 현장 관리자에게 다가간다.

"선생님, 저희 덕태산 등산하러 왔는데 못 들어가나요?"

"산림치유원 공사로 등산 못 해요. 돌아가세요."

"그럼 점전폭포 쪽 말고 덕대사 방향은 가도 괜찮나요?"

"거기는 올라갈 수 있는데, 올라갔다 똑같은 길로 내려와야 해요."

희소식이다. 그 자리에서 전북 진안군 산림과에 전화를 건다. 덕대사로 올라가도 괜찮다는 답변이 온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주차장을 잃어버린 우리는 갓길에 공손히 주차하고 1박 2일 산행을 책임질 짐을 배낭에 넣는다.

덕대사까지 이어진 임도를 따라간다. 제설이 잘돼 있다. 러셀 특집인데 눈 구경도 못 할까 걱정된다. 지겨운 길이 계속된다. 변주를 섞어본다. 가드레일을 넘어 샛길로 들어선다. 촘촘한 나무와 차디찬 기온 탓에 발길이 닿지 않은 샛길엔 눈이 쌓여 있다, 일부러 눈 위로 발을 내딛는다. 등산화 너머로 느껴지는 눈의 찬기가 모험의 시작을 알린다. 귀를 감싸는 뽀드득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덕대사가 시야에 든다. 그 옆으로 나무 계단이 보인다. 계단 위로 한 뼘가량 눈이 쌓여 있다. 사람이나 짐승의 발자국은 없다. 우리가 이 하얀 비단길을 걷는 첫 순례자임이 분명하다. 배낭의 허리끈을 고쳐 맨다. 덕태산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지막한 경사길을 10분 정도 오르자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온다. 배낭이 너무 무겁다. 20kg은 족히 넘는다. 맥시멀리스트인 기자는 이번 산행이 끝나면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허리끈을 조여 매도 무거움이 가시질 않는다. 엄마 나 시지프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무릎까지 빠지는 눈에 고생하는 박기완 선배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작은 언덕을 넘으니 산죽 군락지가 우리를 반긴다. 분명 성장기에 우유를 많이 먹었을 것이다. 얼굴까지 자란 조릿대 이파리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뺨을 간지럽힌다. 스틱으로 얼굴을 가리며 산죽 패거리의 포위망을 뚫고 전진한다.

조릿대 군락지를 지나자 덕태산은 숨겨둔 얄궂은 면모를 드러낸다. 잠자는 덕태산의 코털을 건드린 탓일까. 발목을 감싸던 눈덩이는 종아리와 인사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사도 가팔라진다. 속수무책이다. 덕태산과 온몸으로 포옹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아직 파랗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이번엔 우리가 덕태산에 카운터펀치를 날릴 차례다. 벤치에 앉아 곧바로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한다. 이 반격이 효과가 있길 바랄 뿐이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덕태산 손바닥 안인 걸까? 우리의 반격에 덕태산은 더 높은 눈과 심한 경사로 맞선다. 계속 넘어진다. 미끄러지는 두 다리를 스틱으로 부여잡으며 덕태산에게 빌어본다.

"제발 우리 좀 내버려 둬!"

경사에 발목 잡힌 선배들

덕태산 씨,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덕태산 정상을 앞두고 휴대폰을 꺼내 산행 지도를 본다. 포털 지도의 등산로와 저장한 트랙 경로가 약간 어긋난다. 고민에 빠진다. 두 경로 모두 눈에 덮여 보이질 않는다. 육감을 동원해 등산로를 찾아야 한다. 취재기자의 무거운 마음으로 선두에 선다.

포털 등산로는 절벽을 가리킨다. 로프도 없는 겨울 산에서 저런 곳을 오르는 건 불가능하다. 저장해 온 트랙 경로를 따라간다. 조금 진행하니 산행 표지기가 보인다.

덕태산 정상까지 800m 남았다. 해발고도 400m를 올라야 한다. 한 발짝 무겁게 내딛는다. "샤아악" 오른발이 버티지 못하고 눈썰매처럼 미끄러진다. 이번엔 왼발이다. 이변은 없다. 스틱을 동원한다. 역시 미끄러진다. 분설로 가득한 응달의 급경사는 케르베로스처럼 이방인을 막아선다.

"경훈씨 나와 봐요."

좌절하는 기자가 답답했는지 기완 선배가 선두로 나선다. 기완 선배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분설을 디뎌 철옹성 같은 사면을 오르는 데 성공한다. 뒤이어 올라오는 우리에게 손을 뻗어 잡아준다.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가슴 한쪽이 찌릿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동료애?!

계속해서 몰아치는 급경사에 고개는 발끝만 바라본다.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바지는 젖은 지 오래다. 시선을 거두어 하늘을 바라본다. 파랗던 하늘엔 주황빛 물감이 번져 있다. 먹구름 낀 지평선 뒤로 태양이 자취를 감춘다. 오늘 드론 사진은 글렀다.

태양이 남긴 온기가 하늘에 잔불을 태울 때쯤 덕태산 정상에 도착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잘 곳을 찾아야 한다. 원래 계획이었던 시루봉 옆 헬기장은 너무 멀다. 계획을 바꿔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까지만 진행하기로 한다.

어둠이 온 신경을 마비시킨다. 길은 험해지고 눈은 허벅지에 닿아 있다. 눈앞은 캄캄해지고 찬바람이 얼굴을 할퀸다. 능선의 속살을 헤매던 우리는 멈춰야 함을 직감한다. 넓고 고르게 펼쳐진 하얀 눈밭에 달빛이 비치는 어느 공터에 다다른다. 배낭을 내려놓는다.

봉우리 사이에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를 치고 우모복을 입는다. 저녁은 비화식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도시락의 수증기가 텐트를 가득 메운다. 랜턴 빛에 비친 수증기 속에서 우리는 따뜻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소리는 없어지고 관 같은 침낭 속에 들어가 이른 단잠을 청한다.

다음날 아침 약속한 시간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부은 얼굴을 비비며 샌드위치를 까먹는다. 약간 언 샌드위치가 평소보다 맛있다. 출발하기 전 꼼꼼히 짐을 싸고 얼어붙은 몸을 푼다.

야영 사이트 옆 봉우리에 오르니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시루봉과 남덕유산을 비춘다. 아래로는 가파른 언덕길이 이어진다. 양옆으로 2m 넘는 산죽이 우리를 에워싼다. 머리엔 하얀 털모자를 쓴 산죽 근위병들에게 붙잡혀 한참을 심문당한다.

산죽 근위병은 우리 앞길을 막는 것도 모자라 우리를 미로 속으로 집어넣는다. 온몸을 활용해 길을 찾는다. "으아악!" 선두에 선 효희 선배가 산죽 트랩에 빠져 비명을 지른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다. 긍정적인 효희 선배는 조릿대 트랩의 고통을 유쾌한 춤동작으로 승화시킨다.

산행의 힘듦을 유쾌하게 승화시키는 한효희 선배

포기하는 용기

함정에서 빠져나와 시루봉으로 향하는 마지막 급경사. 우리는 곧바로 스틱을 접어 사륜구동 모드로 바꾼다. 눈 덮인 바위를 손으로 움켜쥐며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낸다.

시침이 10시를 가리킨다. 고개를 드니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시루봉' 팻말이 보인다. 절벽에 다가가 눈물의 인증샷을 찍는다. 잠시 숨을 돌리고 왼쪽 홍두깨재에서 맞은편 선각산 정상까지 이어진 능선을 본다. 고민이다.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 번 진행하면 탈출구는 없다. 하늘을 본다.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포기하는 용기를 선택한다.

선각산과의 셀카 타임

돌아가는 길, 눈 덮인 소나무와 벤치, 승천하는 이무기처럼 하늘을 향해 쫙 뻗은 반송. 어제 보지 못했던 풍경이 보인다. 더 이상 긴장감은 없다. 잠시 산행의 짐을 내려두고 잠깐의 여유를 만끽한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낼 것 같은 먹구름도 물러갔다. 포근한 날씨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가라앉는다. 썰매를 타고 내려가 보기도 한다. 생각보다 재밌다. 선배들은 아예 기차를 만들어 내려온다.

산행의 피로를 눈썰매로 날린다.

덕대사에 내려와 아이젠을 풀어 장비를 정비한다. 이곳저곳 눈이 안 들어간 곳이 없다. 임도에 오니 다리의 긴장이 풀린다. 전동안마기처럼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지그재그로 내리막을 내려간다. 굶주린 배꼽시계의 알람 소리가 온몸에 전해진다. 그 순간 누군가 외친다.

"진안엔 흑돼지가 유명하다던데…."

아드레날린이 폭발한다. 발걸음은 빨라진다. 타우린을 먹은 것처럼 피로가 싹 가신다. 플라시보 효과인지도 모른다. 배낭 멘 세 마리의 나비가 되어 자동차로 질주한다. 임도 차단기에 이르자 반가운 애마가 보인다. 짐을 싣고 눅진해진 몸을 양철 마차에 싣는다. '드릉~드르릉' 엔진 소리는 어느새 '치익-치이익' 고기 굽는 소리로 바뀐다. 불판에 여독을 올려 굽는다. 우리를 괴롭혔던 여독의 연기를 환풍구 속으로 밀어 보낸다.

산행길잡이

백운동계곡에 산림치유원 공사가 한창이다. 2024년 2월까지 할 예정이다. 백운동계곡 임도는 초입부터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선각산 들머리인 점전폭포 방면도 산길을 통제해 놓았다. 공사 관계자와 진안군청에 확인한 결과, 덕태산만 산행 가능하다. 그것도 갔던 길로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가능하다. 다만 덕태산으로 능선에 올라 홍두깨재를 거쳐 선각산 정상까지 가는 것을 막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덕대사 코스는 급경사와 미끄러운 구간이 많다. 홍골 입구에서 덕대사 아래 왼편의 나무 계단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초반부는 대체로 완만하고 길이 선명하다. 하지만 중반부의 경사는 가파르고 등로가 잘보이지 않는다. 덕태산 정상에서 시루봉까지 비교적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임도를 활용한 중간 탈출로가 있지만 공사로 인해 진입할 수 없다. 산죽이 등산로를 가리고 있어 일정 구간 개척이 필요하다. 트랙과 산행 표지기를 잘 살피며 산행해야 한다. 시루봉은 전망이 트여 있어 진행할 경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동쪽으로는 선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종주길이다. 묵은 길이 많아 트랙 파일을 준비해 산행하기를 당부한다.

교통

진안버스터미널에서 백운면으로 와서 백운동행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한다. 진안에서 백운면행 버스는 1일 11회(6:25, 6:50, 7:45, 8:10, 9:30, 10:35, 12:35, 14:30, 15:55, 18:00, 18:45) 운행한다. 이 중 07:45, 14:30분 버스는 백운동까지 간다. 백운면에서 백운동행 버스는 1일 2회(08:20, 14:50) 운행한다. 진안터미널에서 백운동까지 택시비는 2만5,000원 정도다. 문의 진안콜택시 063-430-1414, 063-433-1114.

숙식 (지역번호 063)

숙박은 흰구름이머무는풍경펜션(432-5128), 솔잎펜션(433-0155), 물바람새소리펜션 (010-3655-3661), 백운관광농원(432-4589).

식사는 덕태산장(432-5003), 백운면정류장 근처 섬진각(433-4945), 선희네식당(432-2999)에서 가능하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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