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것’ [책&생각]

최재봉 2023. 2. 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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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허구 섞인 노르웨이 팩션
포의 죽음 뒤에 도사린 비밀 추적
윤리적 문학 vs. 문학의 윤리
문학과 현실 둘러싼 논란도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시인 겸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 노르웨이 작가 니콜라이 프로베니우스의 소설 <공포를 보여주마>는 포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의 비밀을 파고든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공포를 보여주마
니콜라이 프로베니우스 지음, 성귀수 옮김 l 문학동네 l 1만6500원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죽음은 그의 소설만큼이나 미스터리하다. 그는 연고가 없는 도시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병원으로 옮겨진 나흘 뒤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발견되기 전 닷새 동안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숨을 거두기 전에 그는 ‘레이놀즈’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외쳤는데, 그의 정체 역시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포의 사인과 관련해서는 술 때문이라는 등 많은 설명이 나와 있지만, 모두 가설일 뿐이다. 그의 마지막 닷새를 재구성한 영화 <더 레이븐>(2012)은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비롯한 포의 소설들을 모티브로 삼아 포 자신이 연루된 연쇄살인사건을 그렸다. 영화 <인썸니아>의 각본을 쓴 노르웨이 작가 니콜라이 프로베니우스가 2008년에 발표한 소설 <공포를 보여주마> 역시 포의 소설을 모티브 삼아 그의 미심쩍은 죽음 뒤에 도사린 비밀을 추적하는 팩션이다. 포의 문학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루퍼스 그리스월드 등 실존 인물들과 레이놀즈를 비롯한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의 흥미를 더한다.

소설은 1857년 8월 문학평론가 그리스월드가 알 수 없는 존재에 쫓겨 도망치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노인네가 돌아왔어…”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뉴욕 시내의 인파를 헤치고 달리던 그는 어느 교회로 들어가 가까스로 한숨을 돌리지만, 그를 쫓던 존재는 그보다 앞서 그곳에 와 있다. 그리스월드는 그날 밤 자신의 아파트에서 두 눈을 치켜뜬 채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시선이 향한 침실 벽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전직 목사인 그리스월드와 공포소설 작가 포 사이의 문학관 차이는 <공포를 보여주마>의 일차적 갈등을 이룬다. “사람들에게 선(善)을 제시하는 것이 시인의 도리”라는 그리스월드의 말에 포는 이렇게 반박한다. “시는 운율을 통한 미의 발견입니다. 오직 아름다움만이 시의 목표지요.” 교훈적이며 목적론적인 문학관과 유미주의 문학관 사이의 유구한 대립을 상기시키는 논쟁이다. “아름다움이란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포의 주장에 그리스월드는 이렇게 맞선다. “그런 위험천만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취향은 결국 파국을 향한 시학 아니겠습니까….” 그리스월드의 경고성 반론은 일종의 복선으로서 소설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리스월드는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로서 문단에 막대한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지만, 포의 악마적인 재능에 시기심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는 포가 발표하는 작품을 샅샅이 챙겨 읽으며 포에 관한 문학적 전기를 쓰고자 하고, 포가 먼저 죽은 뒤에는 그를 기리는 추도문을 신문에 기고한다. 그러나 그 추도문은 칭찬을 가장한 비난으로 읽힐 소지가 있었으니, “침울한 감정” “경탄할 만한 재능” “타인을 향한 도가 넘는 오만불손함” “성마르고 욕심 많은 성격” “목불인견의 냉소적 태도” 같은 구절들에서 그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스월드의 추도문에서 짐작되듯 포는 당대 문단에 대해 냉소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포의 시점으로 서술된 이런 문장이 그 점을 보여준다. “이곳 미국에서 작가의 운명이란 이른바 ‘미국 문단’이라는 터무니없는 우연과 속물적인 냉소주의의 폭풍우 속을 되도록 의연하고 고고한 자세로 헤쳐나가는 것이다.”

포는 대표작인 시 ‘까마귀’(The Raven)가 인기를 끌자 문단 모임에 불려다니며 시를 낭송하는 등 한때나마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하지만, 고질적인 가난과 병약한 아내 그리고 그 자신의 알코올의존증 때문에 끝내 고통과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리스월드는 그런 포와 애증 관계를 유지하면서 은근히 포에 대한 윤리적 단죄와 그의 몰락을 꾀한다. 그런 그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은 문학사가 입증하는데,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따르면 그리스월드 자신 그런 결말을 예측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제는 알 것 같다. 포의 평판을 엉망으로 만들려 했던 자신의 모든 노력이 앞으로 단 하나의 성과만을 거두게 되리라는 사실. 그는 포의 명성을 더없이 드높이게 될 것이다. (…) 루퍼스 그리스월드는 한낱 탐욕스러운 무뢰한으로 전락하고, 에드거 앨런 포는 존경받고 인기 있는 작가, 영웅적인 인물로 부각되겠지.”

그리스월드로 대표되는 당대 문단과의 관계가 포의 문학 인생에서 큰 비중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소설 <공포를 보여주마>에서 좀 더 본격적인 갈등은 가상의 인물 레이놀즈와의 사이에서 빚어진다. 이 소설 자체가 포의 작품과 같은 미스터리인 만큼 스포일러의 위험을 무릅쓰고 덧붙이자면, 레이놀즈의 존재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서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베레니스’ 같은 포의 소설 속 묘사를 닮은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언론과 문단에서는 작가 포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추정이 난무한다. 작가와 작품, 작품과 현실의 관계를 둘러싼 사람들의 속된 호기심이 들끓는 한편에서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진지한 토론도 전개된다. 문학이란 현실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가상의 세계라는 생각이 한편에 있다면, 문학은 현실의 반영인 것을 넘어 현실의 일부이며 아예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 한편에 자리한다. 레이놀즈는 후자의 생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하겠거니와, 그가 연루된 일련의 사태 한복판에서 포는 이런 상념을 곱씹는다.

“문학과 현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살인과 그 살인의 묘사, 어느 것이 우선인가? 공포인가, 문장인가?”

이 상념의 끝에서 포는 “탈출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그런 아포리아가 포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낳았고 그리스월드의 죽음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게 된다. 두 문인은 죽어 가면서 아마도 레이놀즈의 이런 경고를 되새기지 않았을까. “여러분 모두에게 공포를 보여줄 겁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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