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438) 누구의 아들인가?

관리자 2023. 2. 3.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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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시의 장원 급제한 아들 출생의 비밀은 덮어버리기로

배 진사가 뒷짐을 지고 저잣거리 담 밑을 지나다가 범상치 않은 노인 점쟁이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귀인(貴人)을 만날 게야” 이 한마디뿐이다. 한냥 복채가 아까웠다.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정월대보름이 막 지난 어느 날 ‘삐리 삐리 삐리리!’ 초래 소리, 말발굽 소리 요란하더니 이 초시 아들이 장원 급제해서 백마를 타고 어사화를 꽂은 사모관대를 쓰고 동네에 들어섰다. 사또도 기다리고 있다가 장원 급제를 한 이 초시 아들을 고개 숙여 맞았다.

돼지 잡고 소 한마리 잡고 잔치가 거창하게 벌어졌다. 배 진사는 풀이 죽었다. 배 진사와 이 초시는 어릴 때부터 둘도 없는 불알친구이자 지고는 못 사는 경쟁자였다.

한평생 이어온 경쟁은 자식 농사에서 이렇게 결판이 나고 말았다. 배 진사는 인사치레로 이 초시 집에 가서 몇잔 술을 마셨지만 소태였다. 그는 일찍 집으로 돌아와 찬모가 차려온 술상을 끼고 앉아 한숨과 함께 자작 술을 들이켰다. 해가 떨어졌는데도 이 초시네 잔칫집 장구 소리는 끝날 줄 몰랐다.

밤은 깊어 삼경일 제 ‘똑똑’ 밖에서 문고리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야심한 밤에 누구시오?” “지나가던 탁발승이옵니다.” 목소리가 곱다 했더니 여승이다. 배 진사는 오싹해졌다.

여승은 고개를 숙인 채 말문을 열었다. “진사 어른, 어사화를 쓰고 온 이 초시 아들이 부럽지요?” “쩝쩝.” 배 진사가 대답을 못하고 입맛만 다시다가 깜짝 놀라 술잔을 떨어뜨렸다. “이 초시의 아들이 아니고 바로…” 한숨을 깊게 토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소승의 배 속에서 태어난 진사 어른의 아들이옵니다.” “네가 자실이구나!” 배 진사가 크게 놀라 소리치자 탁발 여승은 울음을 터뜨렸다.

강산이 두번이나 변한다는 20년 전, 주막에서 집으로 오며 이승을 하직한 마누라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찬모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봤더니 자실이가 도르릉도르릉 엎어져 잠이 들었다. 배 진사는 지남철에 끌리듯 방에 들어가 자실이의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자실이는 그때도 말없이 배 진사를 받아들였다.

석달이 지난 어느 날, 자실이는 헛구역질에 자신이 회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밤새도록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 이튿날 새벽 보따리 하나 들고 집을 나섰다. 조그만 암자 삼신암에 보따리를 풀고 부엌일을 하는 공양주보살이 되었다.

출산 달이 가까워오던 어느 날 밤, 백일기도를 드리던 이 초시 부인 막실댁이 부엌일을 하고 자실이는 요사채에 누워서 웬 늙은 산파의 보살핌을 받았다.

요사채에서 자실이 낳은 아기는 산파가 탯줄을 끊자마자 포대기에 싸여 이 초시 부인 막실댁 품에 안겨 사인교 가마에 올랐다.

자실이는 제 배 속에서 나온 제 새끼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막실댁에게 빼앗겼다. 이불을 덮어쓰고 울고 있는 자실에게 주지 스님이 “대갓집 아들이 되었으니 귀공자가 될 거야”라며 자실이를 위로했다.

바로 그때 ‘꽝’ 요사채 문이 부서지더니 검은 복면에 장검을 든 암살자 셋이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와 시퍼런 칼을 휘둘렀다. 피를 튀기며 먼저 쓰러진 사람은 산파였다. “자실아, 도망가거라!” 외치고는 목이 떨어진 건 주지 스님이었다.

통시에 갔다 돌아오던 자실이는 부엌으로 도망쳤다. 암살자들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솔가지, 짚북데기, 삼태기를 칼로 북북 찔렀다. 칠흑 같은 어둠에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조그만 암자 삼신암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사흘이 지나서야 화마에 폭삭 주저앉은 암자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려 마지막 불씨를 껐다. 부엌 터가 어렴풋이 남았는데 오소리인가 곰 새끼인가 새까만 짐승 한마리가 아궁이에서 기어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실이는 그렇게 살아났다.

이 초시 마누라 막실댁이 백일기도를 하다 삼신암에서 낳았다는 아들의 출생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모두 죽고 생모인 자실이만 아궁이 속에 숨어 목숨을 건진 것이다. 모두가 표독스러운 막실댁의 모사였다.

“내 잘못이야, 모두가 내 탓이야.” 배 진사가 가슴을 치며 울부짖자 탁발승 자실이도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방바닥에 박고 어깨를 들썩였다.

배 진사와 자실이의 하룻밤 풋사랑이 만든 씨앗, 이 초시의 장원 급제한 아들의 앞날을 위하여 모든 걸 덮어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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