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시끄러운 꿈 속 말 달리는 중년

김진형 2023. 2. 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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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출신 김도연 소설집
빵틀 소재·대관령 배경 등
꿈·환상 활용 상상력 눈길
중년 남성 비애·유머 그려
▲ 빵틀을 찾아서 김도연

괴이한 꿈 속을 헤맨다. 흰 구름 피어날 때마다 환상이 펼쳐지고, 이상한 행동도 속출한다. 어떤 때는 말을 타고 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깨어날 때까지 그 말을 타고 달려야 한다. 개꿈인가, 개 짖는 소리도 들린다. 한참 뒤 허름한 침대에서 일어난 꿈 수집가는 혼자 떠난 여행에서의 사건들을 기록한다.

평창 출신 김도연(사진) 작가는 ‘사소한 것’에 진심이다. 말과 탁구, 그리고 빵틀을 찾는데 진심이다. 작품 대부분은 평창의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다섯 번째 소설집 ‘빵틀을 찾아서’도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트콤과 독립영화의 절묘한 경계다. 작은 것들을 상징화 시킨 꿈의 속성을 눈여겨 볼 만하다. 표제작 ‘빵틀을 찾아서’를 비롯해 ‘전재와 문재’, ‘탁구장 근처’, ‘말벌’, ‘셰퍼드’, ‘OK목장의 여름’, ‘말 머리를 돌리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사나이’, ‘겨울잠’ 등 단편 9편이 수록됐다.

표제작은 어린시절 ‘나’의 빵틀 찾기 모험담이다. ‘나’의 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빵틀을 갖고 있다. 겨울철이나 농한기에 서로 줄을 서서 빌려갈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한번 빌려주면 바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일요일, 그날도 빵틀이 없었다. “정말이지 어른들은 염치가 없었다”고 생각한 나는 찢어진 우산을 쓰고 빵틀을 찾아 나선다. 월남댁, 재설댁, 대장집, 고모집 등을 찾아다니며 서로의 사연과 세상을 배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향집 아궁이 앞에서 옛 이야기를 듣는 기분도 든다.

도대체 ‘빵틀’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찾아야 하는 것일까. 장항준 감독의 영화 ‘라이터를 켜라’가 은근히 떠오른다.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감각만 남은 것은 아닌지, 김도연의 다른 단편에서 ‘빵틀’은 계속 모양을 바꾸고 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빵틀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이 와닿는다.

점점 작아져만 가는 헛헛한 중년 남성들을 위한 욕망과 열변도 토해낸다. 거대한 이상 담론을 펼쳐보이는 것이 아니다.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았던 지질하고 초라한 이야기들이다. 젊었을 때는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변화 속에 굴욕적인 일들만 늘어난다. 그렇지만 자존심은 놓지 못한다. 여기에 꿈과 환상을 통해 이야기의 형태를 안개처럼 일그러뜨리는 상상력은 흡사 노름판의 ‘타짜’를 연상시킨다. 김도연은 한 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독자를 움직일 다음 패를 숨죽여 고른다. 어처구니 없게도 탁구공이 잡힌다.


‘탁구장 근처’의 ‘나’는 밤낮으로 탁구에 몰두해 있다. 전세금이 올라 부동산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옛 친구도 만났지만 그는 탁구장에 가야만 한다. 작가의 속성이 그렇듯 네트를 넘어온 공은 다시 넘겨야만 한다. “그동안 나는 탁구공이 아니라 작고 가벼운 고독을 치며 놀았던 것 같다”라는 문장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한다. 작가는 실제로 원주에서 탁구 레슨을 받았던 소문난 탁구 마니아다. 그런데 월정사 3대 화상의 업적을 탁구장에 비유한 이야기는 뒷목 탁 붙잡고 쓰러질 정도로 ‘불경’스럽다.

소설에는 유독 동물이 많이 등장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 개, 소, 닭, 토끼, 돼지, 염소 등 여러 동물과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랐던 연유로 보인다. 동물들은 소설의 주요 소재로 쓰이면서 유쾌함과 환상성을 배가시킨다.

‘말벌’ 이야기는 뒤통수가 가렵다. 주말농장을 하며 친해진 ‘박’과 ‘장’과 ‘강’은 오늘도 술판을 벌인다. 인생을 한탄하다 얼떨결에 던진 막걸리병이 벌집을 건드렸고 박은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관 속인데, 가족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뭔가 이상하다. 이들은 그간 ‘박’에게 가졌던 불만들을 하나씩 털어놓으며 그를 땅 속에 묻으려 한다.

‘말 머리를 돌리다’에서는 말이 질주한다. 고향으로 내려와 말 목장을 운영하는 초등학교 친구가 연 동창회,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친구의 태도에 비위가 상한 공무원 주인공은 우연히 말을 타고 밖으로 나온다. 말 위에서 고량주에 짜장면을 먹고, 다방 종업원을 앞에 태우고 달릴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런데 술 마신 말이 멈출 줄 모른다. “요즘 세상에서 말은…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냐”라는 친구의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투자금 대신 받은 ‘셰퍼드’ 두 마리와 산길을 달리는 내용 또한 말그대로 ‘개고생’이다.

최근 산문집 ‘강원도 마음사전’을 펴낸만큼 소설집에도 강원도 토속어에 대한 표현이 다수 묻어나온다. ‘정지(부엌)’, ‘거릿대(삼지창처럼 생긴 농기구)’, ‘주루목(심마니들의 망태기)’, ‘올방구(가부좌)’ 등의 표현이 그렇다.

김도연의 꿈 속은 여전히 시끄럽다. 세상으로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중년 남성은 사나운 수탉에게 계속해서 쪼이고 긁힌다. 그래도 멈추면 안된다. 소리라도 한 번 질러봐야 한다. 어쨌든 부디 조심히 읽기를, 빵틀을 찾다가 빵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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