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좋은 욕, 나쁜 욕, 이상한 욕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2023. 2. 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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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에 맞서는 약자의 무기…해학·풍자 담긴 고품격 욕설
적절한 사용 갈등 해결 도와…욕쟁이 할머니 멘트는 구수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욕설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사회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 청소년의 90% 이상이 일상적으로 욕을 쓰고, 이재명 대표가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한 서울 서초동은 길 하나 두고 온종일 고성과 욕설이었다.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시위 현장에선 시민의 욕설이 가득하다. 욕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지하철 막말녀’와 같은 충격이 없다면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뉴스에 나올만한 욕이라면 전 현직 대통령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작년 가을 한국 사회는 윤 대통령의 욕설 논란으로 시끄러웠고, 문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장기간 욕설 시위를 한 60대는 구속 기소되었다.

욕설은 특정 사회와 종교, 국가에서 공동체의 합의로 통용되는 문화적 현상이다. 문화권마다 그 의미가 다르겠지만 욕설엔 한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욕설로 통용되기 위해서는 특정 문화권의 금기와 연관되는 합의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교적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죄악시해서 욕설에 유독 ‘개’가 많이 붙고, 성적인 언급이나 몸 파는 행위를 부도덕하게 여겨서 ‘ㅆ팔’이나 ‘ㄴ미’ 등을 욕으로 합의하였다.

기독교 문화권인 미국에서는 신에게 버림받을 놈 ‘갓뎀(goddamm)’이 욕이 되고, 개인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상상력 없는 녀석’이 모욕적인 욕이다. 모든 문화권에서 금기시하는 장애를 가리키는 욕설 또한 마찬가지다. 신체적 결함을 멸시하는 병신이란 비속어는 한국에서 원래 몸에 병이 든 사람 즉 환자란 뜻이었다.

사람들은 왜 욕을 할까? 욕설에 관한 사회학과 언어학, 심리학적인 연구가 꽤 많은데 욕설 문화 전문가인 엠마 번의 ‘욕은 당신에게 이롭다’(2018)에 따르면 깜짝 놀라거나 충격적일 때, 누군가를 모욕하거나 혹은 흥미로울 때 욕을 한다. 요즘은 욕설의 긍정적인 면을 조명하는 연구 결과가 눈에 띈다. 드러내기 힘든 감정을 표현하고 환기하는 효과가 있으며 적에 대한 적절한 방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을 포착한다면 사회적 관계에서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욕설의 역사’(2021)는 억압된 정신을 해방하는 욕설의 긍정적 기능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면 더욱 무거운 처벌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격성을 감추고 억제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고 물리적 폭력에는 법적인 제재를 가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신체적인 폭력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욕설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좀 더 안전하게 공격성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욕을 선택한다. 보복의 위험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입으로 내뱉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이다. 욕설로 인한 모욕죄가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검찰이 접수한 모욕죄 사건은 인터넷 발달과 더불어 2001년에 비해 최근 약 25배 급증했다.

어쩌면 욕은 강자보다 약자가 장착한 무기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청소년은 상담시간에 이렇게 말한다. “다들 욕하는데 나만 범생이처럼 말하면 약하고 찌질해 보이잖아요.” 또래집단에서 욕이 주류가 되면 고운 말은 기가 죽는다. 욕을 내뱉으면 사자가 갈기를 세우듯 센 척하면서 강자에 맞설 수 있다. 그 청소년은 자신의 약점을 욕으로 보완하며 약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했다. 문제는, 습관적으로 욕을 하게 되면 우리의 뇌에 ‘욕의 노선’이 새롭게 형성된다. 감정에 부합하는 적절한 말을 선택하려 해도 욕의 노선으로 급발진해서 거친 말부터 튀어나오고 결국 감정조절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때론 불쾌감보다 정감이 느껴지는 이상한 욕도 있다. 가령 욕쟁이 할머니는 평등하게 욕을 한다. 재벌이 가든 고위직이 가든 똑같이 욕먹으니까 자신을 겨냥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사람들에겐 욕하고 싶은 마음뿐만 아니라 욕먹고 싶은 심리가 있다. 살면서 뼈아픈 후회나 죄책감이 들면 깊은 마음에선 자신을 벌주고 싶어진다. 덜 상처 받으면서 안전하게 욕먹는 방식이 뭐가 있을까? 욕쟁이 할머니의 욕은 아프지 않게 웃으면서 벌 받을 수 있는 구수한 욕이다.


욕에도 격이 있을까? 상대를 상처 입히려고 신체 장애나 콤플렉스를 의도적으로 건드리는 나쁜 욕은 언어폭력에 불과하다. 반면 마당놀이와 문학에서의 욕처럼 시대의 아픔과 공감대가 형성되는 욕에는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해학과 풍자가 담겼다. 1980년대 한국 시에는 유독 욕이 자주 등장한다. 울분을 토하며 마음을 정화하고 암울한 시대 금기에 맞서는 해방으로서의 욕. 백합과에 속하는 천문동을 지칭하는 ‘호라지좆’이란 시는 얼마나 후련한가. ‘이 XXX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남는 놈들 앞에서…(중략)…X같은 XX들아 면죄를 구걸하는 고백도 못하는 XX놈들아’.(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1993). 동서고금에 욕이 없는 사회는 없었고 막는다고 없어질 욕도 아니라면 격조 있는 욕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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