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불우

기자 2023. 2. 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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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제작자 에이미 파스칼

2018년 미국 법무부는 북한 경찰국 소속 박진혁을 해킹 혐의로 기소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북한이 김정은을 희화한 <디 인터뷰>를 개봉하려는 소니 영화사를 해킹한 것으로 의심했다. 명확한 증거는 없으며 내부자 소행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트럼프에게 북한이 제일 만만했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2014년에 당한 해킹으로 소니는 미개봉 영화와 임직원의 신상 정보가 노출되어 5600만달러가량의 피해를 입었다. 더 큰 악재는 영화사 대표 에이미 파스칼의 저질 e메일이 폭로된 것이다. 명문 UCLA를 졸업한 후 할리우드의 생존법칙을 빠르게 습득하며 소니를 배경으로 승승장구하던 권력자의 실체는 추악했다. 파스칼이 지인들과 주고받은 e메일에는 버락 오바마에 대해 인종차별적 험담을 하고 앤젤리나 졸리를 조롱하는 등 이중인격자의 속내가 노골적으로 배설돼 있었다. 영향력 있는 유대인 100인에 속하며 할리우드를 주무르던 파스칼은 이듬해 해임되었다.

무소불위였던 제작자 파스칼의 추락은 사실 해킹 때문이 아니었다. 허영과 방종이 만연한 할리우드에서 그까짓 설화(舌禍)로 무너질 허약한 경력의 제작자가 아니었다. 영화산업의 변화를 읽지 못해 돈의 맥을 놓친 죄가 컸다. 파스칼은 <아이언 맨>이 영화산업의 판도를 바꿀 빅뱅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화수분 같은 지주회사의 지원 속에 일급 각본을 확보하고 인지도 높은 배우들을 출연시켜 영화를 만들면 대중은 따라온다고 믿었고 먹혔다. 마블의 도전 앞에 할리우드 웰메이드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에 회의가 들었으나 늦었다.

젊은 제작자 케빈 파이기는 마블의 자산인 캐릭터를 활용한 프랜차이즈물을 기획했다. 인지도 낮은 히어로 캐릭터를 불러내 대중에 각인시켜 장기적으로 써먹을 꾀를 냈다. 인지도 낮은 배우와 연출자를 고용하여 제작비를 낮추는 동시에 캐릭터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파스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역발상이었다.

마블이 디즈니에 매각되면서 초능력으로 무장한 다채로운 만화 주인공들이 엮이며 확장시키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세계관이 할리우드를 지배한다. 전편, 속편, 번외편으로 이야기를 얼마든지 증식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영화 생산 방식이다. 변화에 편승하지 못한 파스칼과 소니는 고전한다. 머천다이징 수익까지 챙기는 디즈니는 할리우드의 절대강자가 되었고 영화 못지않은 명품 드라마가 줄지어 소개되면서 파스칼은 방향을 잃고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파스칼은 성공한 방식대로 실패한 제작자다. 성공에 취해 오만했고 변화의 조짐에 둔감했다. 영화산업을 포함해 생태계는 늘 변한다. 완만한 흐름에 속아 반복이라 착각할 뿐 매 순간 차이를 생산한다. 경계하지 않으면 변화의 속도를 체감하기 어렵다. 늦었다는 반성은 쓰라리다.

전 정부 시절이 정체기로 느껴질 만큼 작년 5월부터 한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고색창연한 도인이 회자되고, 신탁이라 의심이 들 만큼 급하게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시작된 퇴행에 제동이 없다.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 법치를 운운하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국민은 변화의 속도에 어찔하다. 설마 하는 방심을 비웃듯 곳곳에서 상식이 무너지고 안전이 무시된다. 물가를 잡으라니 간첩을 잡는다고 소동이고 외교는 크고 작은 잡음 끝에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장점은 투명하고 빠르게 변화를 실감케 해주는 데 있다. 거침없이 퇴행하며 그동안 누리던 것이 공짜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앞으로 겨울은 더 춥고, 여름에는 땀을 더 흘려야 할 것이다. 임계점에서 비명이 터질 때를 기다려 해결책을 내밀 것이다. 원전 확대와 공기업 민영화 추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불우가 임박했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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