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질문…어떻게 마주할까 ‘인공지능의 세상’[전문가의 세계 - 박승일의 영화X기술]
칼럼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터미네이터2>를 보았다. 영화는 어렸을 때 봤던 그대로였지만, 어느덧 어른이 된 나에게 이 영화는 인간과 로봇의 치열한 전투를 담은 SF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엄밀한 사유와 해석을 요구하는 일종의 텍스트로 다가왔다. 영화를 읽는 법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에 나의 독법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무엇보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그 관계의 양극단 사이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기술 발전을 거부하는 탈성장을 통해서만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최소주의’와 기술 발전을 더욱 가속화함으로써 현재의 세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최대주의’, 이 사이에는 좀 더 전략적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 아닐까? 30년도 더 된 영화를 굳이 다시 소개하는 이유는, <터미네이터2>가 제시했던 질문들이 마치 부메랑처럼 시간을 가로질러 현재의 우리에게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일상화와 함께 말이다.
영화가 제기하는 네 가지 쟁점
“1997년 8월29일 30억명의 인류가 종말을 맞이했다. 이 핵의 불길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이날을 ‘심판의 날’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곧이어 인간은 기계들과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악몽을 마주하게 되었다.”
<터미네이터2>는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까마득히 먼 미래를 상정하는 여느 SF 영화들과는 달리, 1991년에 개봉한 <터미네이터2>는 불과 6년 뒤인 1997년을 인류 종말의 시간으로 제시한다. 당대의 시간이며 임박한 파국이다. 1989년의 독일 통일과 1991년의 소련 붕괴로 인해 이제 더 이상 핵전쟁의 위기 따위는 없을 거라고 모두가 믿던 바로 그때, 영화는 마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인류 종말의 잔혹한 서사를 다시 한번, 그러나 더욱 강렬한 형태로 우리 눈앞에 내놓는다. 인간의 해골 무더기를 밟아 으깨면서 전진하는 로봇 군단의 모습이라니! 새로운 악몽이 아닐 수 없다.
다행인 것은 인류가 또다시 세계대전을 일으킬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인간 이성의 산물인 인공지능이 도리어 인류를 대상으로 핵전쟁을 일으킬 만큼 영리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다행과 불행은 정확히 겹쳐져 있었다.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종말의 가능성은 이전과 달리 더 이상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 아닌 인공지능의 기계적 알고리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판단하는 위치에서 판단되는 위치로 밀려나버리고 말았다. ‘심판의 날’에서 심판은, 그런즉 인간이 하는 심판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기계에게 받는 심판을 뜻한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터미네이터2>의 도입부로부터 적어도 네 가지 중요한 쟁점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 파국의 현재성이다. 파국은 단언컨대, 그것이 언제인지 모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일이자 모두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만큼 문제적이다. 파국의 시간은 임박한 ‘오늘’이며, 이러한 현재성은 파국을 막기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과제를 긴급히 요청한다. 둘째, 문제는 파국을 초래한 원인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인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무기 시스템을 포함한 전권을 갖게 된 것은 인간을 협박하거나 강제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인공지능이라는 기술 혁신이 인류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풍요롭고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 혁신과 그에 대한 맹신이 도리어 파국의 원인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셋째, 개입의 불가능성이다. 파국은 과거 냉전 시대처럼 인간의 신념과 의지 등에 따른 정치적 결과로 나타나기보다는, 마치 도미노와 같이 기계적 알고리즘의 연쇄 작용을 통해 순식간에, 사유와 반성도 없이 출현한다. 영화 설정상으로는 인간이 스카이넷의 폭주를 막기 위해 전원 스위치를 끄려 하자 스카이넷이 이를 막기 위해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나온다. 30억명의 죽음이, 이렇게 인간의 개입을 불허하는 자동화된 시스템에 따라 무감하게 결정된다. 자동화는 달리 말하면 인간 개입의 최소화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넷째,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영화는 이러한 파국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입하고 투쟁하고 다시 일어서는 인간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터미네이터2>는 기술 혁신으로부터 비롯된 인류 종말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려내면서도, 결코 이를 손쉽게 뒤집어서 기술 최소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식으로 타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꺾이지 않는 저항의 의지와 그 치열한 도전의 면면을 보여줄 뿐이다. 파국이 인간의 책임이라면 그 파국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 역시 인간의 책임이다. 나는 이를 최대와 최소의 중간 어딘가에 대한 개입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네 번째 쟁점과 네 명의 인물
네 번째 쟁점, 그러니까 저항의 가능성은 네 명의 인물을 통해 구체화된다. 각각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먼저 사라 코너부터 살펴보자. 그녀는 정신병원에 갇힌 상황에서도 강도 높은 육체 훈련을 계속하는가 하면, 이미 그전부터 전쟁을 대비해서 모처에 각종 무기를 준비해 놓는 등 다가올 미래를 그저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는다. 즉 종말이 올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서의 개입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이버다인사의 기술 책임자를 암살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며, 마침내 인공지능 관련 시설을 모두 폭파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를 급진적 최소주의자 또는 과격 행동주의자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 모든 과업을 그녀는 인공지능 기술의 총체인 T-800(아널드 슈워제네거)과 ‘함께’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그녀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T-800과 악수를 하는 장면은 특히나 상징적인데, 같은 로봇이 1편에서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미래에서 왔던 살인기계였기 때문이다. 기계와의 극적인 화해, 영화는 이 지점에서 모종의 메시지를 던진다. 분노나 거부만으로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사라 코너의 반대편에 사이버다인사의 기술 책임자이자 스카이넷을 만든 주인공인 마일스 다이슨이 있다. 그는 전형적인 개발자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기술 개발을 최우선시한 나머지 자신이 연구하는 최첨단 로봇 팔과 인공지능 칩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그러한 개발의 결과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낼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를 낙관적 최대주의자로 볼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역시 미래에서 온 T-800을 실제로 만나고 심판의 날에 대해 알게 되면서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자신이 평생 연구했던 인공지능 칩 모델을 도끼로 부수는 장면이나 연구소를 폭파하기 위한 기폭 스위치를 들고 경찰들이 다 철수할 때까지 힘들게 버티다가 죽는 장면을 보면, 철저한 기술주의자였던 그가 기술 진보와 그에 따른 위험에 대해 막중한 책임과 윤리를 깨닫게 되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기술 낙관주의에 대한 반성과 그에 뒤이은 이타적인 죽음, 그는 이 마지막 윤리적 행위를 통해 지금껏 부재했던, 기술에 대한 윤리적 개입의 필요성을 수행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인간만 저항의 주체인 것은 아니다. 터미네이터 T-800은 인공지능 로봇이다. 1편에서 그의 역할이 살인기계였다면, 2편에서의 역할은 존 코너(에드워드 펄롱)를 보호하는 수호천사이다. 물론 여기에 그의 의지나 신념 따위는 없다. 애초에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존 코너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삽입된 칩을 리셋해서 학습 기능을 추가한다. 이로부터 편위(또는 어긋남)가 발생한다. T-800은 존 코너가 알려주는 각종 인간적인 언어 표현과 제스처 등을 학습하는가 하면, 그와 교감을 나누고 우정을 쌓기까지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T-800은 절대적인 존 코너의 명령마저 거부한 채 불타는 용광로를 향해 내려간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마지막 칩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프로그래밍된 기계가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의지적으로 자기희생을 감내하는 장면은, 윤리와 책임, 저항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비인간 존재인 T-800도 인간과 함께 다가올 파국에 저항했던 것이다. 최소와 최대 그사이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존 코너, 그는 어머니 사라 코너처럼 급진적 최소주의자도 아니고 인공지능 개발자 다이슨처럼 낙관적 최대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사라 코너의 최소주의를 기계와의 화해로 전환시켜 새로운 연대와 개입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다이슨의 최대주의에 윤리와 책임을 더함으로써 브레이크 없는 진보주의에 제동 장치를 마련한다. 사라 코너에게 필요한 것이 최소주의의 공허함을 채우는 것이라면 다이슨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주의의 맹목성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어딘가에 존 코너가 있다. 그는 T-800이라는 최첨단 기계와 상호작용하고 우정을 나눔으로써, 그리고 그 비인간 존재에게 인간적인 윤리를 학습시킴으로써, 기술 적대도 아니고 기술 찬양도 아닌 새로운 기계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간다. 미래의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다름 아닌 인공지능 로봇 T-800을 과거로 보낸 것 또한 그러한 태도의 연장선일 터이다. 최소주의와 최대주의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기, 그러면서 기계와 함께 기계에 저항하기, 그는 가장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개입주의자인 셈이다.
그래, 가 보자
정해진 건 없어
우리가 만드는 거야
최소와 최대 사이, 개입의 가능성
파국은 현재적이고 전면적이며 불가역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개입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 자신이 초래한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뿐이다. 인공지능의 반란이라는 영화 속 위기만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위기는 기후, 환경, 빈곤, 전염병, 자원, 전쟁 등 그야말로 삶의 전 영역을 관통하고 있으며 심지어 계속해서 그 위세를 더해나가고 있다. 그야말로 매번 새롭게 꾸는 악몽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터미네이터2>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저항이 가능하며, 또 그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영화는 끝내 위기를 극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미래는 결국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다 그렇지 뭐!’ 하고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여기서 배우지 못하면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배울 수 없다. 배움은 감독의 의도나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의 것일 수 있다. 문제는 한결같이 ‘사유’이다. 나는 이 영화가 최소주의와 최대주의라는 급진적인 이상, 그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라 코너의 화해와 다이슨의 윤리, T-800의 편위처럼, 그리고 존 코너의 연대처럼, 최소나 최대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또한 동시에 최소와 최대의 허점을 동시에 공략하고 보완하는 절충적 개입의 형태를 띤다. 달성 불가능한 이상을 꿈꾸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 전략적으로 개입하면서 그 현실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인간의 개입 지점을 늘리고 또 그렇게 저항의 가능성을 넓혀나가는 것, 아마도 이것이 바로 개입주의의 기획이자 목표일 것이다.
물론 최소주의와 최대주의가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기술에 대한 태도이다. 개입주의는 기술 발전을 거부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대신, 길들인다. 기술로부터 비롯되는 위험을 예측하고 방지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 절차를 마련하고,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기술 발전을 촉구하며,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또한 부와 권력에 의한 기술 지배를 막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투쟁을 시도하며, 이 가운데 전부 또는 전무가 아닌 한 발자국의 진보를 요구한다. 개입주의자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다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할 뿐이라고. 사라 코너와 다이슨이 멈춘 바로 그 자리에서 존 코너가 새 발자국을 내디뎠듯이 말이다.
노파심에 한마디 더 하자면, 개입주의가 더 옳다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마주한 선택지가 최소와 최대, 이렇게 단 두 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더 나아지는 것은 없다. 다만 여행에 앞서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을 확인하고 가자는 것뿐. 자, 가보자.
▶박승일
캣츠랩(CATS Lab) 소장이자 기술문화연구자. 공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아울러 인문학도 공부하고 있다. 정직한 공부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기계, 권력,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박승일 캣츠랩 소장·기술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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