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 갑질·여성 혐오… 필름에 새긴 ‘사회 고발장’

엄형준 2023. 2. 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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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성스러운 거미’ 8일 개봉
칸 비평가주간 폐막작 ‘다음 소희’
‘여고 실습생 극단적 선택’ 모티브
비인권적 업체 불공정 행위 조명
칸 여우주연상 수상 ‘성스러운 거미’
이란 여성 16명 연쇄살인 실화 그려
영화 공개 후 이란 정부 처벌 위협도
‘세상의 진실을 마주하는 창.’ 영화는 때로 현실을 보다 깊게 관조하고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경시하거나 외면했던 진실을 알려주거나 상기시켜준다.

오는 8일 개봉하는 한국 영화 ‘다음 소희’와 이란 출신의 감독이 찍은 덴마크 영화 ‘성스러운 거미’는 동떨어진 나라에 이질적인 삶을 조명하지만, 그런 면에서 닮았다.

2일 영화계에 따르면, 다음 소희는 지난해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의 폐막작으로 이미 전 세계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영화는 판타지아국제영화제, 아미앵국제영화제, 도쿄필맥스영화제, 핑야오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이 밖에도 수많은 국제 영화제에 소개됐다.

성스러운 거미는 칸 영화제에서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다수의 상을 받았고, 부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됐으며,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예비후보작(shortlist)에 올랐다.

중요한 건 영화제에서 무슨 상을 받았냐가 아니라 수많은 국제 영화제가 두 영화에 주목한 이유다.

◆두 영화, 실화 바탕으로 사회 부조리 고발

다음 소희와 성스러운 거미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다음 소희는 2017년 1월 통신회사의 하청업체인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3학년 여고생의 사건을 재조명한다.
‘다음 소희’에서 여고생 소희는 통신사 콜센터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 세상은 약자인 실습생들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똑 부러지고 활달한 성격의 소희(김시은 분)는 담임 교사의 “대기업 취업”이라는 말에 신이 나지만, 첫 출근날 기대는 산산이 부서진다. 콜센터는 실습생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고객의 계약 해지를 막으라고 요구한다. 한 해에만 90%가량의 직원이 그만두는 콜센터에서 소희는 이전 소희를 대체할 뿐이다. 업체는 아직 미성년자인 실습생들에게 이중 근로계약서를 쓰게 하고, 수당 지급을 미루고, 고객의 욕설을 견디길 강요한다. 지옥 같은 곳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소희에게 ‘왜 그것도 못 견디냐’, ‘그래서 그만둘 거야?’라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성스러운 거미는 2000년대 초반 이란 최대의 종교도시인 마슈하드에서 16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범죄를 ‘지하드’(성전)라 주장한 연쇄살인마 ‘사이드 하네이’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를 추적하는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스러운 거미’에서 여성 저널리스트인 라히미는 16명을 살해한 ‘거미’의 뒤를 쫓는다. 영화는 여성에 대한 이란 사회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거미의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 건축업에 종사하는 아내와 아들, 딸 둘을 둔 이란의 평범한 가장인 사이드 아지미가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하늘(알라)의 뜻에 심취해, 성지 인근에서 매춘하는 밤거리의 여성을 죽이는 것을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는 살해당한 여성이 늘어날수록 초조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더 많은 매춘 여성을 죽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미혼 여성 혼자라는 이유로 호텔 직원이 예약된 방을 내주지 않으려 하는 마슈하드에서 여성 저널리스트인 라히미가 거미를 쫓는 일은 쉽지 않다. 경찰은 10명이 넘는 희생자가 같은 수법으로 같은 장소에 버려졌음에도 용의자조차 특정하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라히미에게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낸다.

◆현실 쉽게 바뀌지 않지만… 영화는 진실 기억의 도구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이나 그 후에도 세상은 소희와 이란의 살해당한 여성 같은 약자에게 여전히 냉혹했다.
다음 소희의 모티브가 된 여고 실습생 자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실습생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고 통신업체 하청 콜센터의 비도덕적·비인권적 영업 방식이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영화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은 지난달 31일 시사회 후 가진 간담회에서 “촬영이 얼마 안 남은 때 여수에서 요트 바닥 따개비를 떼던 학생(실습생)이 죽었고, 엄청난 사회적 이슈가 되며 교육부 장관이 나와서 사과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사과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또 잊히는 그런 과정을 보는 게 참담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이 언급한 사건은 2021년 10월 전남 여수시에서 특성화고교를 다니던 홍정운군(당시 17세)이 홀로 잠수작업을 하다 사망한 사건이다. 홍군은 원래 선박 운항 준비, 선박 정리, 접객 등의 업무를 하기로 돼 있었다. 현장실습 표준협약에 따르면, 실습생에게 위험한 작업을 시켜서는 안 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사과가 아닌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이후 사건이 발생한 요트업체 대표는 1심에서 징역 5년, 업체는 2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지만, 2022년 7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대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업체는 벌금 1000만원으로 감형했다.
이란은 거미가 거리를 활보하던 때보다 더 참혹한 상황에 놓였다.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됐다가 의문사한 후 이란에선 히잡 반대 시위가 이어지며, 당국에 의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이 무대지만, 이란 정부의 반대로 요르단에서 촬영했고 영화 공개 후에는 이란 정부가 프랑스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이란 사람이 영화에 연루됐다면 처벌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하나의 영화가 세상을 단번에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이미 지난 일인데 왜 굳이 이 얘기를 끄집어냈을까. 정 감독은 “너무 늦었지만 이제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영화를 만들고 준비하는 와중에 그런 일(실습생의 죽음)이 생기니까 다음 소희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던 것도 같다”고 했다. 또 “몰랐던 아이, 몰랐던 죽음이 왜 계속해서 마음에 남는지 이해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며 “소희라는 아이, 어쩌면 많은 소희들이 영화를 통해 살아갔으면 좋겠다. 관객의 마음에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막 안에서 소희의 아픔은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고, 관객 경험이 스크린 밖으로 나올 때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게 ‘소희’ 앞에 ‘다음’을 붙인 정 감독의 믿음인지도 모른다. 국적은 달라도 성스러운 거미를 연출한 알리 아바시 감독의 마음도 크게 다르진 않을 터다. (영화와는 무관하겠지만, 이란은 계속된 히잡 반대 시위에 지난해 말 도덕경찰의 활동을 중단했다.)

덧붙이자면, 두 영화의 닮은 점은 또 있다. 다음 소희와 성스러운 거미는 무거운 주제 의식을 평범하지 않은 서사 구조로 풀어낸다. 사건은 그리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가 예정된 죽음까지 바꾸진 못했지만, 다 볼 때까지 결말을 속단해선 안 된다. 다음 소희의 카메라 촬영 기법과 거미 살인자의 감정 변화에서 감독의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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