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키리바시의 한국인 유해

서의동 기자 2023. 2. 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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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골함. 연합뉴스

적도 근처 태평양에 산호초로 이루어진 타라와섬.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서서히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키리바시공화국의 수도다. 80년 전 ‘철의 폭풍’이 타라와섬에 몰아쳤다. 1943년 11월 일본군이 장악한 섬에 미군이 상륙을 시도하면서 벌어진 ‘타라와 전투’다.

과달카날 해전 승리로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잡은 미군은 태평양의 일본군 전략거점을 하나씩 탈환한 뒤 일본 본토로 북진한다는 구상 아래 타라와섬에 3만5000명을 투입했다. 함포사격과 함재기 공습으로 주력을 파괴한 뒤 해병대를 상륙시키면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전투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수천명이 희생됐다.

일본군은 해안에 수백개의 벙커와 토치카를 설치하고, 상륙용 장갑차의 접근을 막기 위해 해안에 쇠꼬챙이와 통나무들을 박아두며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진지 구축에 투입된 2200여명의 노무자 중 강제동원으로 끌려온 조선인이 1400명에 달했다. 미군이 잡은 포로 145명 중 128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다. 나머지 1200명의 조선인은 전투에 휩쓸려 희생됐다.

25세 청년이던 최병연씨도 그중 한 명이다. 1942년 아내와 두 아들을 뒤로한 채 일본군 노무자로 끌려갔다가 1년 후 타라와 전투에서 희생됐다. 유족들은 전사통지서만 받아든 채 최씨를 가슴에 묻었다. 그러다 2018년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이 타라와섬에서 아시아계 유해를 발견했고, 유족과 유전자 대조를 실시한 결과 최씨임이 확인됐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연기되다 올 상반기 중 국내로 유해를 모시기로 했다. 최씨의 유해가 들어오면 ‘태평양지역 강제동원’ 희생자 국내 봉환의 첫 사례가 된다.

정부는 그간 일제하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발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본 시민들이 수습한 유해를 한국 정부·민간단체가 넘겨받는 식이었고, 발굴 지역도 일본과 러시아 사할린 정도에 그쳤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은 물론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타국에서 전사한 장병의 유해 발굴·송환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DPAA가 아니었다면 최씨의 유해도 섬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역을 떠도는 원혼들을 국내로 모시는 일에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서의동 논설위원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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