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한 5공 시절 민주화운동 도운 숨은 주역이었죠”
‘전태일 분신’ 계기 노동운동 참여
교회협 간사로 민중 생존권투쟁 연대
서독 인권단체 ‘테르 데 좀므’ 연계
전태일기념관 등 민주단체들 지원
1987년 ‘공안 조작사건’으로 고초
미 변호사 됐으나 내내 고문 후유증
[가신이의 발자취] 고 최혁배 ‘71동지회’ 친구를 보내며
1970~80년대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고도 자신이 했던 활동을 드러내지 않는 주역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있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지난달 21일 갑작스레 이승을 떠난 최혁배 변호사도 그런 사람이다.
그와의 인연은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만난 것은 1970년 서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였다. 작달막한 키에 도수 높은 안경, 그리고 곱슬머리인 그의 첫인상은 사진에서만 본 작곡가 슈베르트를 떠오르게 했다. 과 동기인 그와 나는 교양과정부에서 같은 반에 배정됐고, ‘후진국사회연구회’란 이념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다 1971년 가을 ‘위수령 사태’ 때 나란히 제적당해 이른바 ‘71동지’가 됐다.
그는 대학 시절 정보기관에 여러 차례 연행돼 고초를 겪었는데 일일이 기술하려면 끝이 없으니 초점을 좁혀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주요한 것은 대학생 때부터 깊은 관계를 맺은 전태일의 청계피복노조, 옛 서독의 시민단체 ‘테르 데 좀므’(인간의 대지)와 연관된 활동이다.
청계피복노조와의 관계는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에서 비롯됐다. 충격적 사건이 전해지자마자 그는 대학 선배와 함께 청계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후 청계피복노조와 이소선 어머니 등 가족들과 깊은 신뢰를 쌓았다. 그는 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대학 3년 후배 전종덕과 함께 구로공단에 들어갔지만 감시가 심해 지원 활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사회사업선교회 간사로 일하면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의 생존투쟁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테르 데 좀므’ 활동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테르 데 좀므는 1960년 스위스에서 시작해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아동인권 보호를 전면으로 내세워 활동하고 있는 국제조직이다. 생텍쥐페리의 작품에서 단체 이름을 따온 이 조직은 나라별로 단체를 조직해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한다. 그가 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 시절 접촉한 서독의 테르 데 좀므는 1967년 창립됐다. 애초 설립 목적은 전화에 휘말린 베트남 어린이를 독일로 공수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이후 제3세계로 활동 무대를 넓혀 기근 지역의 영양실조 아동 구조, 구조적 빈곤이나 강제 노동에 노출된 아동 지원 사업을 했다.
서독의 테르 데 좀므는 1960년대 말 세계를 휩쓴 젊은이들의 항거인 ‘6·8혁명’ 세대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모금한 돈이 설립목적에 맞게 쓰이기를 원했다. 1983년께 고인은 서독 쪽의 의향을 고려해 교회를 통한 재정지원과는 별개의 독립된 사업을 지원하기로 서독 본부와 의견을 모았다. 그가 국내의 여러 단체와 접촉해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면 서독의 한국 담당 간사 테오 돔이 실사해서 본부에서 지원을 결정하는 구조였다. 그 지원 대상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전태일기념사업회’ ‘청계피복노동조합’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등 주요 단체가 망라돼 있었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애정을 보였던 것은 전태일기념관(평화의 집)이었다. 지난 2011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테오 돔은 전태일 관련 지원금액이 24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약 1억4400만원)에 이르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1980년대 전두환의 철권통치 아래서 어렵게 활동을 이어가던 여러 단체에 재정적 활로를 열어주었다가 정보기관으로부터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안기부는 그가 서독 유학 기간에 접촉한 적이 있는 교포 물리학자를 북한 공작원으로 단정해서 엄청난 공안사건을 조작하려 했다. 그와 전종덕(독일어 전문 번역가)은 1987년 11월 안기부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구속되어 1988년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 자격을 딴 그는 뉴욕에서 개업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1990년대 말 귀국했다.
한때 속보로 등산하며 다리 힘을 자랑하던 그는 점점 지팡이를 짚더니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외출하기 어려운 신세가 됐고 코로나 재앙 속에서 아내 이경숙과 유일한 피붙이 딸을 남기고 허무하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속된 명예는 처음부터 찾지 않았으니 이름과 사랑만 남기고, 부디 저승에서라도 허리 꼿꼿이 펴고 힘차게 두 다리로 서기를 기원한다!
박원표/전 세계사이버기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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