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으로 만들어가는 세상, 그 중심엔 노인이 있다 ['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조용철 2023. 2. 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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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헬스
(16) 노인은 사회적 연결고리이자 세상의 접착제
명절에 어르신 찾는 관습 이어지며
가족·친지 등 혈연으로 인연 맺어져
기업서도 연장자 중심 조직 결속력 생성
오래 살수록 사회에서 인간관계 영향 커
인연 연결하는 노인의 가치·의미 재해석
명절에는 전통적으로 집안 어르신들과 가족을 만나고 조상을 기리게 된다. 그동안 바쁜 일상을 탓하면서 찾아 뵙지도 못했던 어르신들을 설이나 추석이라는 관습 덕분에 만사를 제치고 만나서 얽히고 설켰던 지난날을 이야기한다.

어르신 중심으로 가족이 모이고, 친지가 모이고, 함께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서로의 관계를 다지면서 함께 사는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 만일 이러한 과정에 중심이 되어온 어르신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생각해 본다. 애를 쓰고 힘들여서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친척들이 찾아오는 모임들이 가능할 것인가.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있다. 어렸을 적 시골 외갓집에서 많이 살았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남달랐다. 그래서 서울에 살면서도 명절은 물론, 일만 있으면 으레 외갓집을 찾아 자주 안부를 여쭈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다음 외할머니마저 차례로 돌아가셔서 장례를 모시러 내려갔을 때 외조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외숙모님이 내게 한마디 하셨다. "장조카, 이제는 외갓집 안 오겠네." 그래서 바로 반박했다.

"무슨 말씀인가요?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그런데 외숙모 말씀이 뼈있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 후 20여년 동안 외갓집을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핑계야 많았다. 바쁘게 살다 보니 외숙내외분 보러 갈 겨를이 없었다. 우선 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 그 지역에 공적인 일이 생겨 들르게 되어 찾아 뵈었을 때 외숙모님 말씀이 되새겨지면서 가슴을 찔러 왔다. 가족관계의 측면에서는 외조부모님과 외숙부모님과는 1촌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그 1촌의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외숙부모는 외조부모와의 관계에서 덤으로 만난 셈이었다. 외조부모님이라는 고리를 통해서 외숙부모가 연결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경험도 이러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떠난 후에는 연결고리가 풀려 형제들도 소원해지고 친척들과의 교류도 멀어져 간다. 집안 어르신의 자리 비움이 가족들과의 연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일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는 모든 조직에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치집단이나 기업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직을 이끌던 어르신이 있을 때는 단단하게 연결되어 한 몸처럼 움직였지만 한 사람의 사라짐으로 그 모든 조직이 와해되는 위기를 겪게 된다. 한 사람 중심으로 연결됐던 모든 고리들이 풀려버린 탓이다.

아무리 규정이 있고 원칙이 있다고 해도 중심이 되는 사람이 없으면 조직의 결속력은 해체되고 연계성을 상실하고 만다. 그런데 한 사람이 가족, 기업, 정당 및 모든 사회조직에 미치는 영향은 그 사람이 오래 살면 살수록 더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인연의 고리를 더 크게 많이 맺게 되고 그 고리를 통해 일들이 해결되고 확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이든 노인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에 수많은 인연을 맺게 되어 있다. 어떤 인연도 없이 독불장군으로 살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얼개 아래서 다른 사람은 물론 자연계의 산천초목과 온갖 동물들과도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불교에서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연기론을 핵심원리로 삼아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라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현상은 종횡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의 상태로 개인은 일체세계에 통하고 일체세계는 또한 개인과 밀접하게 관계돼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인연의 업보는 끊을 수 없는 연계로 묶여 영원한 윤회의 굴레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어떤 것도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인연은 수없는 시간을 거쳐 어렵게 맺어졌다고 했다.

옷깃 한번 스치는 것도 오백겁의 인연이고 부부는 칠천겁, 부자지간은 팔천겁, 사제지간은 일만겁의 인연이라고 했다. 한 겁이 4억3200만년임을 감안하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인연의 확률이 얼마나 까마득한가를 강조하면서 삶에 있어서 인연의 엄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연기론적인 인연 개념은 실제로 대중의 삶에 그대로 녹아 들어가서 만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삶의 원리로서 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이듦이란 더더욱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들어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 많은 인연을 쌓게 되고 그 고리를 통해서 더 넓은 세상과 연계돼 왔기 때문이다.

인연의 고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방안이 되어 세상을 윤활하게 돌아가게 하는데 필요할 뿐 아니라 연계된 사람들을 결속하고 외롭지 않게 하며 조직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인연의 고리를 악용하는 인위적 사례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굴레를 만들어 차별적 행동을 통해 거시적 인연 세상을 무시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반사회적이고 반우주적인 사건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이 인연으로 얽혀져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대승적 시각에서 인연의 의미를 새길 것이 요구되고 있다. 백세인과 같은 초장수인들을 보면 물질적 아집을 버리고 우주만물과의 인연을 느끼며 보다 더 안온한 세상을 기리는 노년초월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분들이 빚어낸 연결고리는 세상을 보다 더 밝고 아름답게 이끌 수 있다.

따라서 노인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새롭게 이해하고 노인들이 세상을 서로 연결하여 따뜻하게 이끄는 역할이 기대된다. 나이 들면 들수록 그만큼 더 크고 더 많은 사회적 연결고리를 만들어 세상을 이어주며 접착제로서의 역할을 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미래 고령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투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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