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됐다”는 말이 2차 가해가 되는 이유[이태원 참사 100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이태원 참사 발생 다음 날인 지난해 10월30일 오전 현장 영상 유포와 혐오 발언을 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담긴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혐오와 낙인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여 재난 상황을 해결하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학회의 당부는 지금도 유효하다. 참사 100일을 사흘 앞둔 2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에는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시민들의 추모와 “슬픔을 강요 말라”는 극우 단체의 2차 가해가 공존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포털 뉴스 댓글엔 혐오성 댓글이 추천 상위권을 차지했다.
“참사 희생자를 보다 성숙하게 추모하고 기억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트라우마 전문가인 오강섭 대한신경의학회 이사장(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과 백종우 재난정신건강위원회 위원장(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백 위원장은 “이번 참사는 도심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에서 발생했고, 그 자리에 수많은 목격자가 있었다”며 “스마트폰 촬영이 이뤄졌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사진·영상 유포 등으로 인한 간접외상을 가장 우려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제 진료실에서 한동안 간접외상을 호소하는 많은 환자를 만나기도 했다”고 했다.
자연재난이 아닌 인재라는 점이 유가족들을 2차 가해로 내몰기도 한다. 오 이사장은 “인재는 사고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갈등이 심한 편으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가해가 유족들에게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며 “치유를 위한 여러 노력이 한 마디 댓글에 무너지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고 했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도 참사 유가족에게는 상처가 된다. 대형 참사에 따른 트라우마 증상의 발현과 지속 기간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나 사회가 ‘지원 의지’를 선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백 위원장은 “유가족들은 죄책감으로 스스로 도움받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길 수 있어 지속적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 이사장은 “재난으로 인한 외상으로 트라우마를 받은 분들은 재난과 관련한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특히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병하면 세상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공포심을 갖게 된다. 세상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살만한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주는 것이 사회와 주변에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참사 희생자를 위한 추모 공간과 유가족 소통 공간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이들은 “희생자들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애도와 치유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다만 충분한 시간과 사회적 소통이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 위원장은 “미국에서도 ‘911 메모리얼’을 설립하는 데 10년의 기간이 소요됐다”며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의 숙고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은 치유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번 참사 직후 학회가 즉각적인 성명을 낸 것은 과거의 ‘학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내에 마련된 재난정신건강위원회에는 15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하고 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산하 국가트라우마센터도 세월호 참사 이후 설립됐다.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이태원 참사 유가족·부상자를 위한 진료연계센터에는 정신의료기관 97개가 참여해 국가트라우마센터와의 연계 진료를 진행했다.
전문가들은 이들 기관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에서 일하는 전문의는 2명에 불과하다. 백 위원장은 “과거에는 참사를 극복하는 문제가 개인에게 맡겨졌다면, 우리사회도 어느 정도 선진국에 진입한 만큼 참사에 대한 대응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인터랙티브] 피할 수 있었던 비극, 이태원 참사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2/itae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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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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