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숨어서 봤다” 소문났던 교토의 조선통신사 행렬

서울앤 2023. 2. 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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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도진간기’(唐人雁木) 포구에서 ‘통골(痛骨)의 귀(코)무덤’까지 조선통신사의 길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지난해 열린 교토의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 이 행사는 3년간의 코로나19 사태에도 중단 없이 계속됐다.

200년간 12차례 방문한 조선통신사

대규모 사절단이 일본에 문화 전수

‘통신사’ 이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져

가을마다 재현 퍼레이드 ‘우호’ 다짐

옛 포구엔 ‘조선사절 왔어요’ 표지석

도요토미 기린 신사 앞 ‘귀(코)무덤’은

전쟁의 역사 되새기는 아픈 교훈장소

2018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올라

해마다 교토에서는 조선시대 일본 방문 사절단인 조선통신사 재현 행사가 ‘교토 코리아 페스티벌’의 하나로 열린다. 지난해 9월18일 교토국제교류회관을 출발한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은 풍물패가 우리 민요와 농악으로 흥을 돋우는 가운데 쓰시마번사를 앞세운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가 국서함을 받들고 오카자키공원 일대를 행진했다. 조선시대의 문사와 화가, 예인들의 모습도 표현하고 있다. 민단교토본부가 주최하고 교토한일친선협회 등이 후원하는 조선통신사 재현 행사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중단 없이 계속됐다. 나라 간의 관계는 나빠도 사람 사이의 끈은 놓지 말자는 상징이다.

사절단과 막부관리를 태우고 요도강을 거슬러 교토로 향하는 ‘황금선’ 그림(1711년).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일본(마지막은 쓰시마)을 방문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피로인(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송환과 문화 전수를 통해 일본의 침략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있었고 일본 쪽에서는 대규모 조선사절단의 방일 행사를 통해 막부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기에 200여 년에 걸쳐 계속될 수 있었다.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규모의 종합문화사절단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해 뱃길로 오사카까지 온 뒤 막부가 제공한 배로 갈아타고 요도(淀)강을 거슬러 교토에 들어왔다. 교토에서부터는 육로로 에도(도쿄)에 갔다.

요도강의 옛 요도항은 교토로 들어가는 선착장이었다. 교토시 후시미구 게이한선 요도역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노소교차로가 나온다. 그 한쪽에 ‘도진간기구지’(唐人雁木旧趾)라고 쓴 표지석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물길이 바뀌어 포구는 없어졌지만, 이곳이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상륙해 본격적으로 육로 행진을 시작하는 기점이었다. 도진간기란 지명도 조선통신사로 인해 생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도요쿠니신사. 신사 앞 오른쪽 길가에 ‘귀(코)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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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간기의 도진(唐人)은 조선사람, 간기(雁木)는 육지로 올라서는 계단시설을 뜻한다. 일본에서 당(唐)은 한(韓)과 함께 ‘가라’로 훈독되는데 모두 사실상 ‘한인’을 가리킨다. 가라는 아마도 ‘가야’에서 왔을 것이다. 요도항을 관할하는 요도번은 조선통신사가 올 때마다 3년 전부터 준비에 들어갈 만큼 이 행사를 중시했기에 도진간기란 특정 시설물이 지명으로까지 됐다. 교토시 미나미구에도 ‘가라하시’(唐橋)라는 지명이 있다. 일찍이 신라, 주로는 발해사절단이 교토에 들어올 때 건너던 다리가 있어서 생긴 지명이라는데 여전히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는 도진간기에서 일본에 공식 상륙, 가라하시가 있는 남쪽 교외를 지나 도지(東寺)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 뒤 교토 시내대로를 행진해 다이토쿠지, 혼노지, 혼코쿠지 등 숙소로 지정된 큰 절에 머물렀다.

교토는 조선에도 중요한 경유지였다. 명색뿐이지만 왕이 있는 ‘왜경’(倭京)이고 고려 이래 수백년간 한-일 사이 창구 구실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교토에는 쇼군과 회견할 때 3주간 정도 장기 체류한 적이 있으나, 대부분 왕복 각각 1~2일 정도 머물렀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풍속화 ‘조선인래조도’(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초기 사절단(이때는 회답겸쇄환사) 때는 짧은 일정 속에서도 전쟁 때 끌려온 피로인들을 만나 그들의 애환을 듣고 귀국 교섭에 진력했다. 사절단이 귀국 뒤 남긴 기록에 의하면, 구경 인파 속에서 울고 있는 조선 여인, 사절단 방문 소식을 듣고 멀리 남규슈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피로인 현실을 알리러 달려온 사람, 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흘렀는데도 사절단 행렬을 따라오며 간절히 고향 소식을 묻던 여인의 사연 등은 읽는 이들의 가슴을 찢어지게 한다.

10~2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조선사절단은 교토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통신사가 올 때면 막부는 시민들에게 소동에 대비한 각종 금지령을 발동하며 몰려드는 구경꾼을 통제하는 데 골치를 썩여야 했다. 1711년에는 일본 왕이 군중 속에 숨어서 통신사 행렬을 구경했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조선 국왕이 쇼군에게 보내는 ‘국서’는 막부의 권위를 상징하기에 백성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가마에 실어 날랐다.

우리 통신사 일행은 교토의 마치나미(거리 형태와 사람들의 생활상)를 비롯해 일본의 이모저모를 주의 깊게 관찰해 기록으로 남겼다. 제1차(1607년)의 부사 경섬은 “네거리마다 상가가 종횡하고 물건이 산더미 같고 구경 나온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제3차(1624년)의 부사 강흥중은 “교토가 오사카보다 10배는 큰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1719년 제술관 신유한은 수확을 다 못하고 있는 풍성한 들판, 곡식 농사와 함께 목면 재배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교토 근교 농촌의 활기에 주목했다.

통신사라는 이름은 세종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단순한 사신 교환을 넘어 ‘성신’(誠信·진실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는 바람이 담겼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 한-일 관계는 아주 좋았다. 이런 성신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이다.

사절단이 일본에 ‘공식’ 상륙했던 옛 요도포구 표지석 ‘도진간기구지’.

통신사가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환송연 비슷한 것이 교토에서 열렸는데, 1719년 조선사절단이 이를 거부하면서 분쟁이 발생했다. 행사 장소가 도요토미가 세운 절(대불전) 앞인데다 부근에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이총(또는 비총)이 있다는 걸 안 우리 사절단이 크게 분노했다. 도요토미가 대형 불상을 짓고 귀(코)무덤을 만든 것은 희생자에 대한 자비나 위령 따위가 아니라 실은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고 무위를 후세에까지 전하겠다는 망상의 소산이 아니던가. 이후 이 행사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2003년 교토시가 정비한 이총의 안내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는 자성의 문구가 담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도요토미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신사가 여전히 이총을 ‘전공’처럼 거느린 모습은 한·일 모두에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깊이 경계시키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베어간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귀(코)무덤’.

대불전 분쟁 당시 일본 외교관이었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렇게 한탄했다.

“(대불전 앞의 행사는) 일본이 자기 나라에 이런 진귀한 대불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은연중 상대방이 이총을 보게 함으로써 일본의 무위를 뽐내고 싶어서라고 들었다. 그러나 부처의 공덕에 무슨 대소의 차이가 있는가. 이총도 도요토미가 무명의 병사를 동원해 무수한 인민을 살해하도록 한 포악을 거듭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느 쪽이나 우리 나라의 불학무식을 드러낼 뿐이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조선통신사 연구자로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2018년)시키는 데 공헌한 나카오 히로시 선생이 86살을 일기로 지난 1월1일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도서관에서 나카오 선생의 연구물을 열람할 때 그의 저작이 ‘인권연구센터’ 이름으로 출판돼 선생 개인에게도 궁금증이 일었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재일한국인 인권운동에 앞장선 분이었다. 선생은 앞에 인용한 글에서 일본인에게 “이 아메노모리 호슈의 ‘눈’을 잊지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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