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싸우면서도 민생 챙긴 고려말 신·구법파 사대부 배워라

김세희 2023. 2. 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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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초상 - 목은영당본(왼쪽)과 고려사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 출범식에 참석한 뒤 먼저 자리를 뜨며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김진표 국회의장.<연합뉴스>

"백성이 경작하는 땅 주인이 혹 3~4가(家)이거나 혹 7~8가(家)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조(租)를 바치면 부족하고 돈을 빌려도 이자가 늘어나기만 합니다. 어떻게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기를 수 있겠습니까."([고려사] 열전 이색의 상소)

"한 토지에 한 명의 주인만을 둠으로써 백성이 숨을 돌려 쉴 수 있게 하고,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엄격하게 금지하고 다스리십시오."( [고려사], '식화지' 조세, 우왕 9년 2월 권근의 상소)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주(州)를 넘고 군(郡)을 포괄하며 산천을 경계로 삼고 모두 가리켜 조업지전(祖業之田)이라고 하면서 서로 훔치고 빼앗으니, 한 이랑의 주인이 5~6명을 넘고 1년에 조(租)를 거두는 것이 8~9차례에 이릅니다…(중략) 법에 따라 후세 사람들이 사사로이 토지를 주고 겸병하는 폐단을 없애기를 원하옵니다. 선비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며 국역을 담당하는 자도 아니면 토지를 줄 수 없게 하시고, 토지를 받은 자도 사사로이 서로 주거나 받지 못하게 하는 금지 규정을 엄격하게 세우십시오."([고려사], '식화지' 전제, 우왕 14년 7월 조준의 상소)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한 고려 말. 사대부인 이색과 권근, 조준은 해마다 왕에게 경쟁하듯이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에 나온 바와 같이 권력자들이 백성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정치권력을 활용해 강매하거나 노비를 동원해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 지방 수령 아전들과 결탁해 토지문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점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권력자들은 빼앗은 토지로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로 넓은 농장을 만들었다. 백성들이 터를 버리고 도망하거나 도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치권의 도덕적 각성과 철저한 사정, 처벌이 요구됐다. 사대부들은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색과 권근은 토지문서에 따라 '일전일주'(一田一主, 한 토지에 한 명의 주인)의 원칙을 확립할 것을 제안했다. 반면 조준은 기존 권력자들의 땅을 모두 없애고 직역 부담 여부에 따라 새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모두 민생 현안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안정화를 위한 해결책을 내세웠다.

나라의 위정자로서 상당히 상식적인 행위를 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운 점이 있다. 이색·권근과 조준이 극심한 권력투쟁을 하던 사이였다는 것이다. 전자는 고려 왕정을 복구하려는 구법파 사대부, 후자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신법파 사대부였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때마다 반대세력을 숙청하거나 유배를 보냈고, 심지어 왕까지 폐위시키기도 했다.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우왕·창왕·공양왕의 폐위도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다.

그럼에도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두 세력 모두 끈을 놓지 않았다. 관찬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이색의 문집인 <목은집>, 정도전의 <삼봉집> 등을 보면, 구법파와 신법파 모두 경쟁적으로 백성들이 처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진단한 뒤, 구휼제도를 제시하는 상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국회의 여야 정치권은 어떠한가. 고물가·고환율·고금리 등 이른바 '3중고'에 이어 최근 '난방비 폭탄'까지 민생 과제는 쌓여가는 데 여야 정치권이 민생 정책을 놓고 경쟁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말 그대로 민생 실종이다.

국민들은 날이 갈수록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데, 여야 정당은 '자중지란'으로 1월 임시국회를 허송했다. 국민의힘은 내내 윤심(尹心·윤석열 대통령 의중)을 고리로 당권 내전을 벌였고, 민주당에선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대응을 두고 친명(친이재명)계와 비명(비이재명)계가 티격태격했다.

서로를 물어뜯는데는 두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여야다. 민주당은 연일 "윤석열 검사 독재정권"을 외치며 장외투쟁과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수사를 위한 특별검사 도입카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카드를 꺼냈다. 이제는 특검과 파면이 관철될 때까지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겠다고 한다. 국민을 위한 건 누가봐도 아니다. 이재명 대표 수사에 대한 맞불용이다. 속이 뻔히 보인다.

대통령실과 정부 여당도 만만치 않다. 대통령실은 김 여사와 관련된 의혹을 제기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연이어 고발하고, 국민의힘은 연일 이 대표 저격에 나서고 있다. 상대의 공격에 '매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덤이다. 자신을 향한 검찰 수사가 '창작 소설'이라는 이 대표의 주장을 "신작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라고 꼬집고, '검찰 독재 정치'라고 비판한 것을 두고는 "이재명 정치야말로 범죄 독재 정치"라고 맞받는다. 민생 올인은 말 뿐이다. 야당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국민은 무너지는 경제와 민생에 절망하고 있는 데, 도대체 언제까지 일 안 하고 싸울 것인가. 이 정도면 정치권이 오히려 '민생의 짐'이 되가고 있는 것 같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정신 좀 차려야 하지 않을까. 망해 가던 고려말도 이러진 않았다.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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