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이란 출신 박씨마 목사"이란은 지금 자유를 위한 혁명 중"

박준범 2023. 2. 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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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2년 1월 29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박씨마 목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만요] 이란 출신 박씨마 목사"이란은 지금 자유를 위한 혁명 중"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자유와 인권을 위해 100일 넘게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이란인데요. 오늘의 주인공은 이란 출신으로, 이란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실상을 알리기 위해 애쓰시는 분입니다. '진정한 이란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계신 박씨마 목사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 박씨마 목사(이하 박씨마)> 안녕하세요.

◇ 이성규> 우리 청취자 여러분께 간단하게 소개 한번 해주시겠어요?

◆ 박씨마> 네, 안녕하세요. 이란에서 대한민국에 43년 전에 오게 된 박씨마라고 합니다.

◇ 이성규> 43년, 완전히 이제 한국분이라고 해도 되는데. 코가 저보다 좀 높으시네요.

◆ 박씨마> 대신 눈은 많이 작아졌습니다.

◇ 이성규> 43년이라고 그러셨는데, 그러면 귀화를 하신 건가요?

◆ 박씨마> 79년에 제가 대한민국에 남편을 따라서 오게 됐고요. 저희 남편이 한국 사람이라서 90년도에는 이제 귀화를 하게 됐죠. 79년에는 대한민국에 입국을 하게 됐고요. 남편하고는 이란에서 76년에 만나서 결혼하고, 우리 첫 아이는 거기서 낳고, 그렇게 해서 이슬람 혁명 때문에 더 이상 이란에서 살게 되는 것이 좀 어려워져서 한국에 오게 됐죠.

◇ 이성규> 근데 남편분을 이란에서 만났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만나셨어요? 얘기 좀 해주실래요?

◆ 박씨마> 제가 어릴 때 저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미국 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분이 이란에서 큰 미국 회사, 그 회사의 임원 중 한 분이었는데 그 회사가, 그 당시에 아시다시피 이란은 굉장히 개방돼 있었고 음악이나 술과 이런 것이 모든 것이 다 개방이 돼 있었기 때문에 그 회사에 클럽이 있었어요. 근데 저희 남편은 원래 음악을 했던 사람이고. 그래서 이제 자기 음악 팀을 데리고 이제 이란에 들어왔던 거고요. 저희 아버지 회사에 있는 그 클럽에 팀을 데리고 음악 일을 했었죠. 근데 거기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만나게 됐습니다.

◇ 이성규> 클럽에 자주 가셨나 봐요?

◆ 박씨마> 아주 갔던 건 아닌데요. 그런데 만나기는 저희는 피크닉에서 만났어요, 사실은.

◇ 이성규> 회사 피크닉이에요?

◆ 박씨마> 피크닉이였는데 음악 하는 사람들 초대를 해서 거기서 만나게 됐어요.

◇ 이성규> 남편분은 그 음악 팀 중에 어떤 역할을 했나요?

◆ 박씨마> 팀장이었죠.

◇ 이성규> 팀장인데 직접 보컬을 했다거나 악기를 했다거나?

◆ 박씨마> 원래 색소폰을 합니다. 그래서 테너를 했었던 거고요.

◇ 이성규> 색소폰 연주나 테너 노래 부르거나, 여기에 이렇게 조금 매력을 느끼셨나요?

◆ 박씨마> 글쎄요. 저는 매력을 못 느꼈던 것 같고요. 남편이 아마.

◇ 이성규> 색소폰 불다가 목사님을 이렇게 뵙고 빠졌군요, 남편분이.

◆ 박씨마> 당시에 인기가 좀 있었습니다.

◇ 이성규> 왜 인기가 있으셨어요?

◆ 박씨마> 글쎄요. 제가 또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떡합니까.

◇ 이성규> 그 말씀을 청취자 여러분께서 궁금해 하실 것 같아요.

◆ 박씨마> 거기가 그 회사 사람들이 있고 그러다 보니까 여자들이 귀했죠. 그러다 보니까 또 이렇게 젊은 아가씨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또 총각들이 시선들이 갔겠죠.

◇ 이성규> 근데 그렇게 해서 결혼하시고. 아까 잠깐 이슬람 혁명 말씀하셨는데, 한국으로 오시게 된 계기가 그런 것과 연관된 건가요?

◆ 박씨마> 그렇게 해서 결혼해서 일하면서 잘 살았고요. 남편이 이란에서 나중에 식당을 하게 됐어요. 한국 식당을 하게 됐어요. 근데 이란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많이 시끄러워졌죠. 사람들이 데모들 하고, 많은 술집들을 부수고, 식당들도 술을 팔기 때문에 또 부수고, 이렇게 많이 했었어요. 강력하게 데모들을 했었어요. 그래서 불 지르는 것도 있었고 극장 같은 것도 불 지르고 은행도 불 지르고 막 그랬었어요, 그 당시에. 그때에 저희 식당도 피해를 보게 됐고요. 그 와중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양아버지가 미국 사람이다 보니까 이제 엄마, 아버지는 먼저 미국으로 떠나게 됐고요. 그리고 이제 저희들은 더 이상 이란에서는 살기가 좀 위험하고 그래서 아이도 어리고 그러니까 떠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이렇게 해서 떠나게 된 거죠.

◇ 이성규> 그래서 이제 한국으로 오셨군요, 목사님이신데, 이란은 대부분이 이슬람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목사님이 되신 거죠?

◆ 박씨마>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겠지만요, 한국에 오고 나서 당시에 저희 남편도 불교 집안이었고요. 그래서 저도 전혀 기독교하고는 관계없이 살았던 사람이고 그랬는데, 이제 한국에 온 이후에 어떤 계기로 인해서 저희 남편이 기독교를 접하게 됐고요.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저한테 소개를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저도 이제 기독교인이 된 거죠.

◇ 이성규> 어떤 계기로 종교를 바꿀 수가 있었을까요?

◆ 박씨마> 남편이 사업을 했었어요. 한국에 온 이후에 사업을 했었는데 사업 실패를 했어요. 굉장히 큰 실패였고 그래서 너무 좀 힘든 그런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그런 계기가 있었어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계기가 됐었죠.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자기 힘으로 살아왔지만 더 이상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빌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 이성규> 그리고 또 신학 공부도 그 뒤에 또 하셨겠네요?

◆ 박씨마> 네. 저는 그 당시에 그러니까 80년도부터 저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됐지만, 사실 중간에 제가 교회를 떠나는 그런 시절도 있었어요. 그런데 2000년도에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름 받고서는 이제 온누리교회로 가게 됐었는데 그 당시에는 한 목사님이 계셨었던 당시인데, 이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데가 있으니까 이거를 관리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그렇게 했다가 2005년도에 제가 신학 하러 미국에 가게 된 거죠. 그래서 거기서 이란어로 신학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돌아온 다음에 이제 또 이렇게 사역을 하게 된 거죠.

◇ 이성규> 이제 한국에도 이란 분들이 꽤 많이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중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은가요? 어때요?

◆ 박씨마> 사실 지금 이란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많지는 않아요. 예전에 비하면 지금 전국적으로 다 해서 아마 1,500에서 2,000 정도밖에 안 되는 걸로 보고 있습니다. 근데 기독교인은 굉장히 적습니다, 숫자가. 이란은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적고요. 그나마 그것도, 지금 있는 기독교인들도 사실 난민으로 대한민국에 오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고요. 또 여기서 예수님을 믿고 난민으로 인정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을 때는 난민들은 대한민국 국민과 똑같은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들 해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험료도 굉장히 비싸고요.

◇ 이성규> 예를 들면 어떤 보험료를 말씀하시는 건지?

◆ 박씨마> 의료보험이 지금 난민들, 외국인들이 대다수가 한 14만 원, 15만 원 정도 돼요. 한 달에. 그러니까 적은 돈이 아니죠. 그 사람들은 어떤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 노동자들, 그런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들이 있어요.

◇ 이성규> 지금 한국에 계신 이란인 모임, 이쪽에서도 활동을 하고 계시죠?

◆ 박씨마> 네, 저희가 지금 시위를 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제가 한국에 43년 동안 살면서 대한민국에서 우리 이란인 커뮤니티가 없었어요. 이란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없다 보니까 이번 기회에 이렇게 좀 만들어야 되겠다 싶어서 재한이란인 네트워크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만들었습니다.

◇ 이성규> 이제 그렇게 하다 보니까 한국에서 살기가 좀 힘들다, 어렵다, 그런 측면은 어떤 게 있어요?

◆ 박씨마> 외국인으로서 말씀이신가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보험 같은 경우도 있고요. 또 특히 지금 이란 사람들은 미국 제재 때문에 은행 계좌 개설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이 좀 커요. 그래서 지금 물론 노무자분들도 어려움이 있지만 유학생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특히 이제 장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장학금을 받아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은행 계좌 개설을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 어려움들을 많이 겪고 있죠. 이란에서 송금되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죠.

◇ 이성규> 그럼 어떻게 해결해요?

◆ 박씨마> 그러니까 굉장히 힘듭니다, 지금. 굉장히 힘들어요. 대다수는 이제 대학교 교수님들이라든지 이런 분들이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게 그렇게 또 쉽지는 않죠.

◇ 이성규> 좋은 것들도 있나요, 한국에서 사시면서?

◆ 박씨마> 한국이요. 자유가 좋죠. 어쨌든 간에 그래도 언론의 자유가 있고 또 지금 국민들은 아마 피부로 와 닿지는 않겠지만 저희 이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난 9월부터 우리가 그 시위를 시작을 했잖아요. 복장 때문에 일단은 그렇게 시작이 됐잖아요. 근데 복장이 한국에서 자유롭게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고 얼마나 큰 일인지 아마 대한민국 여성들은 잘 모를 겁니다. 저희는 그거를 알죠. 그러한 자유 또 말을 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굉장히 크죠.

◇ 이성규> YTN 라디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란 출신 박씨마 목사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님, 우리 이때쯤 노래 하나 듣거든요. 어떤 노래 하나 소개시켜 주겠어요?

◆ 박씨마> 글쎄요. 저와 남편의 만남도 굉장히 귀한 만남이었고 또 저와 하나님의 만남도 귀한 만남이라고 생각해서 <만남>을 추천하겠습니다.

◇ 이성규> 박씨마 목사님이 추천한 노사연의 <만남> 듣고 오겠습니다.

노사연 / <만남> Play

◇ 이성규> 네, 노사연의 <만남> 듣고 오셨고요.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국에 거주한 지 40년이 넘은 이란 출신 박씨마 목사님입니다. 박 목사님, 작년 9월이었죠. 이란에서 히잡을 바르게 작용하지 않았다 해서 체포된 여성이 의문사를 했죠. 이거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 박씨마> 네, 맞습니다. 물론 마흐사의 죽음은 처음은 아니에요. 그 이전에도 많은 여성들이 그런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요. 지금도 당하고 있고요. 그래서 억압적인 그런 정치가 처음은 아니었지만은 일단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제 이란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나게 됐죠.

◇ 이성규> 근데 그 히잡이라는 게 이란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 박씨마> 히잡은 호메이니가 79년도에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고 나서 히잡을 의무화를 만들었죠. 반드시 써야 된다. 안 쓰면 이슬람에서는 이거는 있을 수가 없다라고 했는데. 물론 이슬람에서는 히잡을 쓰게 돼 있지만 사실 지금 많은 이슬람 국가들은 히잡을 안 쓰고 있는 나라가 오히려 많고요. 또 히잡이 선택으로 돼 있는 나라도 많습니다. 이란도 예전에는 선택이었죠. 안 썼던 것이 아니라 선택이었죠. 물론 팔레비 왕의 정권에서는 히잡을 안 쓰게끔 만들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했어요. 왜냐하면 이란이 그 당시에 개발 당시였고요, 굉장히 유럽을 따라가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썼고 그랬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히잡을 벗기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을 했어요. 그러나 그 후에 선택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선택할 수 있게끔. 그 이후에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에도 그것이 선택이었다면 아마도 지금 이런 일이 없었을 거예요. 사람이 죽는다든지 또는 지금 이렇게 또다시 혁명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굉장히 강요했고 여성들은 자유가 없게 된 거죠. 히잡은 단순히 그냥 머리를 쓰는 정도의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컨트롤을 한다고 봐야 되죠. 그러니까 여성은 히잡을 씀으로써 일단은 남성 밑에 컨트롤 받게끔 되는 거죠. 그리고 남성은 또 정부가 컨트롤 하게끔 만드는 거죠. 그래서 여성은 히잡을 쓰게 되면 제재를 받는 곳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성 가수가 될 수 없습니다. 여성 대통령도 될 수가 없고요. 물론. 또 여성 경찰도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는 교통경찰도 여성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미니스커트를 입고요. 경찰복 미니 스커트를 입고. 그런데 그런 것도 없고요. 여성들의 직업이라든지 모든 면에서 많은 제지를 받게 되죠. 또는 여행을 가려고 하면 반드시 남편의 승낙서가 있어야 됩니다. 그냥 승락이 아니라 승낙서가 있어야 돼요. 그거를 제출해야지만 여권을 발급받을 수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또 국내 안에서도 여행하기가 쉽지 않아요. 여성 혼자서. 그러니까 여성 혼자서의 힘이라든지 자유가 다 마비가 되는 거죠. 그것이 히잡으로부터 발생이 되는 거죠.

◇ 이성규> 그러니까 총체적인 여성 인권을 탄압하는 상징물이군요?

◆ 박씨마> 맞습니다.

◇ 이성규> '도덕 경찰'도 도입하고 그랬던데. 요즘 상황은 어때요, 이란에?

◆ 박씨마> 사실은 이란 정부는요, 우린 도덕 경찰이라는 것이 없다고 얘기를 해요. 아예 그거를 부정을 합니다. 도덕 경찰이라는 단어도 우리는 없다라고 잡아떼죠. 그런데 도덕 경찰은 있었고요. 수많은 도덕 경찰의 행위가 카메라에 다 찍혀 있기 때문에 없다고 부정한다고 해서 그게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있었고요. 근데 지금은 이제 좀 자자해졌어요. 없어졌다고 볼 수 없어요. 없어졌다고들 주장을 해요. 한쪽에서는 아예 애초부터 없었다고 얘기를 하고요. 한쪽에서는 잠깐 있었다가 없어졌다. 지금은 없다. 더 이상은 없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많이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죠.

◇ 이성규> 근데 박씨마 목사님이 국내에서 히잦ㅂ 반대 시위도 이끌고 계시죠?

◆ 박씨마> 네. 지금 한 3개월 지나가니까요. 더 이상은 히잡 반대 시위가 아니고 반정부 시위죠, 이제는. 반정부 시위고요. 그리고 지금 이란 안에서는, 이란 국민들은 쿠테타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43년 전에 한 번 혁명이 일어나서 공화국이 됐지만 다시 한 번 그거를 이란 국민들은 뒤집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걸로 지금 보고 있습니다.

◇ 이성규> 그러면 각국의 연대, 호응, 지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호소를 하고 계시겠네요?

◆ 박씨마> 예. 지금 사실 저희 한국에서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이란 디아스포라가 있는 나라라면 전부 다 지금 똑같은 심정으로 똑같이 지금 시위대를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란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란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지기 위해서 자기네들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서 다 시위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시위할 때에 이란의 남성분들도 많이 동참하고 계신가요?

◆ 박씨마> 물론이죠. 이건 '여성의 혁명'이라고 그렇게들 얘기하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히잡 시위로 시작을 했지만 더 이상 히잡 시위가 아니니까, 지금은. 그래서 '여성의 혁명'이라고 지금 그렇게 얘기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만이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 뒤엔 또 남성들이 도와주고 있죠. 그래서 여성들이 나가서 시위할 때 그 아버지 또는 오빠, 남동생 같이들 나가고요. 그렇게 해서 남성들이 많이 나가죠. 물론. 왜냐하면 지금 우리 구호가 '여성, 삶, 자유'지 않습니까? 그것이 구호인데. 여성에게 자유가 없고 삶이 없으면 남성도 삶과 자유가 없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물론 같이 해야지만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같이 하고 있죠.

◇ 이성규> 이란 모임도 이끌고 계시고 그런데, 한국에서 이러한 실상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올해 준비 중인 사업도 있으신가요?

◆ 박씨마> 사업이라기보다는 저희가 대한민국의 재한 이란인 네트워크를 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임을 활성화시켜서 이란을 좀 더 많이 알리려는 것이 저희들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 외에도 이란의 문화라든지 이런 것이 참 알리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은데요. 그래서 그거를 이런 기회에 한국 국민들한테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 이성규> 끝으로, 우리 청취자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면 해주시죠.

◆ 박씨마> 이란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좋겠고요. 이란을 좀 주시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정말 이란 사람들은 굉장히 문화라든지 풍습이라든지 이런 것이 가깝습니다, 한국하고 이란하고는. 그래서 굉장히 금방 친해지고 또 참 허물 없이 이렇게 같이 지낼 수도 있고 그러는데. 이란 사람들 보시면 좀 많이 응원해 주시고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고요. 이란 시위하는 데 지지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란 출신 박씨마 목사님 모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박 목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박씨마>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YTN 박준범 (pyh@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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