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돌이’ ‘비봉이’도 법적 권리를 가질 수 있을까...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 추진 1년
수차례 논의 거쳐 추진 방향 잡아
제도화부터 공감대 형성, 도입 방식 논의 필요
동식물 같은 자연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생태법인’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된 지 1년 째를 맞고 있다. 생태법인은 자연과 동식물 가운데 생태적 가치가 중요한 대상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인기에 힘입어 제주 남방큰돌고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들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는 생태법인 도입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2월 국회에서 첫 토론회가 열린 이후 1년 동안 토론회와 자문 회의가 잇따라 열렸다. 제주도는 현재 조례 또는 특별법을 제정해 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을 지정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1년간 전문가 논의 이어져
법률에서 자연은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해왔다. 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는 사람(자연인)과 기업이나 재단 같은 법인만이 가능했다. 자연이 피해를 입어도 소송 주체는 될 수 없었다. 생태법인이 도입되면 회사가 법인으로서 법적 권리를 누리듯 동·식물도 권리를 갖게 된다. 더 나아가 대리인을 통해 권리를 내세워 보호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 생태법인 개념이 제안된 건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희종 제주대 강사는 지난 2020년 ‘생태민주주의를 위한 생태법인 제도의 필요성’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생태법인의 개념을 제안했다. 2021년에는 제주 남방큰돌고래에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했다.
지난해 2월 해양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와 제주에 지역구를 둔 더불어민주당 오영훈(현 제주도지사), 송재호, 위성곤 의원은 국회에서 생태법인 지정과 관련해 입법정책토론회를 처음 연데 이어 4월에는 제주도의회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이어 해양수산부와의 간담회, 관련 포럼 등에서도 생태법인 지정을 두고 논의가 이뤄졌다.
이달 13일에는 제주도청에서 김희현 제주도 정무부지사 주재로 ‘해양생태계 보호 방안 마련 전문가 자문회의’가 열렸다. 제주도청 주관으로 개최한 생태법인 도입과 관련한 첫 논의였다. 제주도는 의회 소속 국회의원, 도의회를 거쳐 도청 단위에서 남방큰돌고래를 생태법인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남방큰돌고래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준위협종으로, 국내에서는 제주에 약 120마리가 살고 있다. 준위협종은 보호 조치가 중단될 경우 멸종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종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해양보호생물로 지정되어 있긴 하지만 해양쓰레기나 해상풍력발전소, 관광업이 번성하면서 서식지를 빼앗기고 있다. 인기 드라마 덕분에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상 보호받지 못하는 동물 중 하나로 분류된다.
◇ 생태법인, 뉴질랜드 입법 사례 가져와 적용할 수 있어
자연에게 권리를 주는 사례는 해외에선 흔히 있다. 뉴질랜드 의회는 2017년 마오리족이 사는 ‘환가누이강’의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하고 이를 대리하는 법인 사무국을 설치했다. 조치에 따라 환가누이강 주변의 동식물과 바위는 환가누이강의 소유로 인정받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정부와 마오리족이 1873년부터 환가누이 강의 소유권을 두고 싸웠다. 약 150년이 지난 2017년에 와서야 권리를 강에 돌려준 셈이다.
스페인은 지난해 석호(바다와 강이 만나는 연안에 형성된 호수)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에콰도르는 2008년 국민투표를 거쳐 자연의 권리를 헌법에 명시했다. 자연은 지속되고 회복할 권리가 있다며 장소나 동·식물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 모두의 권리를 인정했다.
생태법인 논의에 참여하는 국내 전문가들은 한국에 맞는 제도를 도입하려면 뉴질랜드의 사례를 살펴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에콰도르처럼 자연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인정하기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며 “뉴질랜드 사례처럼 특정 장소나 동물의 권리부터 점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뉴질랜드는 정부와 마오리족이 각각 1명씩 환가누이강의 권리를 대리할 인물을 뽑고 있다. 박 교수는 “기존의 환경 관리 방식이 정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면 생태법인은 주변과 적절한 관계 형성이 핵심”이라며 “정부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전문가, 관광업자나 개발업자같은 이해 당사자 그룹이 모두 관여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헌법 개정 대신 조례나 제주특별법으로 진행할 듯... 그러나 의견 나뉘어
생태법인을 도입하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현행 헌법은 자연과 동·식물 등을 물건으로 보고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이유로 생태법인 제도 도입이 자칫 더뎌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제주도가 지자체에서 제정하는 조례나 자치권을 보장받는 제주특별법으로 생태법인 제도 도입을 추진하려는 이유다. 제주도 관계자는 “조례나 제주특별법 중 어느 것으로 할지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생태법인을 조례로 진행할지, 제주특별법으로 추진할지 의견이 나뉜다.
박규환 영산대 법학과 교수는 조례를 제정한 뒤 생태법인을 설립하자는 의견이다. 박 교수는 “조례로도 충분히 생태법인 제도화를 진행할 수 있다”며 “법률화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과정이 복잡하고 국회에서 큰 이슈가 되지 않는 이상 폐기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제주특별법 역시 법률인만큼 국회 통과가 필요하다보니 과정이 복잡하다”며 진행 과정이 빠른 조례를 통한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태현 교수는 “조례가 만들기는 수월하지만 법적 구속력은 약하다”며 제주특별법을 통한 추진의 필요성에 무게를 실었다. 조례는 지방자치단체가 정하는 법이지만 법적으로 소송 자격을 주장할 수 있는 제주 특별법은 상대적으로 실효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조례는 판례에 따라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울 수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구제를 받도록 해야지만 생태 법인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조례로 할지 제주특별법으로 할지 방식에 따라 수월성과 실효성을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 공감대 형성도 우선... 생태법인과 함께 생태법원 도입도 고려해야
법률적인 논의 외에도 생태법인에 대한 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남방큰돌고래를 포함한 해양 생물을 생태법인으로 지정하면 보호 규제로 어민이나 관광업자, 해양개발업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박태현 교수는 “생태법인은 인간뿐 아니라 돌고래 같은 동물의 이익도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이를 위해선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미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해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생태법인 제도에 앞장서는 양영식 제주도의회 의원도 “용어 자체가 워낙 생소해 공감대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며 “관련 연구단체와 포럼을 열어 대중적인 공감대 형성에 힘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생태법인 도입 방식에도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제주도청 관계자는 “생태법인 제도를 도입하고 대상을 정할지 또는 남방큰돌고래처럼 미리 대상을 정해놓고 생태법인을 추진할지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생태법인을 제주 곶자왈이나 지하수에도 적용하자는 의견이 있어 이 부분 역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한편에선 생태법인과 함께 ‘생태법원’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생태법원은 환경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원을 말한다. 생태법인과 함께 도입된다면 생태법인은 누가 할지, 대리인 중에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은 없는지 판단하는 주체가 된다. 박태현 교수는 “생태법원은 생태법인보다도 장기적인 과제”라며 “전부터 환경을 담당하는 별도의 법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생태법인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제도화에 집중하며 내실다져야
제주도는 올해 해양 생태계 보호에 예산 2000만원을 들여 생태법인 공론화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제주도청에 확인한 결과 생태법인 자체에 배정된 예산이 아닌 생태계 보호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회에 배정된 예산이다. 생태법인과 관련해서는 오는 3일에는 제주도청에서 ‘생태법인 제도화 의의와 추진 전략 숙의 토론회’가 열린다.
박규환 교수는 “지난해에는 생태법인의 필요성을 설득시키기 어려웠으나 올해 들어 도청과 의회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한국의 생태법인 도입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도 빠르다 볼 수 있고 제도화되는 것은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생태법인을 처음으로 제안한 진희종 강사는 “생태법인 논의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환경단체와 전문가, 의원들이 모두 관심을 두고 있어 고무적”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생태법인 제도화에만 집중해서 너무 빨리 진행되는 것 같아 걱정”이라며 “밀도 있는 관련 연구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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