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잡대’ 조롱...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천현우 작가·前용접 근로자 2023. 2.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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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플라자]
공고 나와 전문대 졸업했지만 공장일 할 땐 불편한 적 없었다
바깥 사회는 달라… 현실서 차별은 물론 온라인서 ‘지잡대’ 조롱
수도권 대학 나온 평범한 청년?… ‘진짜 평범’에 굴욕감 줄 뿐

공고 나와서 창원 폴리텍대학을 졸업했다. 훌륭한 선배들 덕에 공장 일하는 내내 출신 덕을 좀 봤다. “폴리텍 출신들이 일 잘한다”라는 인식이 있어서 경력에 비해 과분한 일도 곧잘 맡았다. 공장 사람들은 오히려 4년제 출신을 홀대했다. 가방끈 길면 빠릿빠릿하지 않고 회사에도 오래 안 붙어 있으리란 불신이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오래 일한 탓에 학벌로 삶이 불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 삶 바깥의 사회는 달랐다. 현실에서도 차별이 있었지만 온라인에선 특히 심했다. 온라인에선 나와 내 친구들이 졸업한 학교들은 몽땅 ‘지잡대’로 싸잡혔다. 지방대학이 수도권 대학보다 머릿수도 더 많고 다니는 사람도 더 많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퍼지기 시작한 멸칭(蔑稱)은 금세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산골짜기 입지와 열악한 시설, 노력하지 않는 학생과 게으른 교수, 비리가 한가득한 사학 재단, 중소기업이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졸업생…. 온갖 미디어와 커뮤니티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미지는 곧장 진실이 되어 유통됐다. 그 결과 지잡대는 망해도 싼 곳, 다니거나 다녔던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곳이 되어버렸다.

/일러스트=이철원

부끄러움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마땅히 해야 할 말도 두 번 세 번 망설이게 만든다. 지방대 내부자들은 침묵하거나 아예 외부자보다 더 자기 처지를 냉소하며 광대 역할을 자처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소위 명문대생들이 지잡대 운운할 때마다 입을 다물었다. 괜히 나섰다가 지잡대생이 ‘열폭’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난생처음 언론사에서 칼럼 연재 제안을 받았을 때도 첫 질문이 “제가 써도 되나요?”였다. 칼럼 지면을 차지한 필자 대부분이 좋은 대학 나온 지식인 아니던가.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단지 독자들이 똑같은 ‘필자’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게 되면서부터 매일 언론 기사를 접했다. 청년정책조정위원회 활동을 겸하면서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온갖 데이터들도 보았다. 이젠 확신할 수 있다. 작금의 한국 사회 전반이 생각하는 ‘평범한 청년상’엔 지나치게 거품이 끼어있다. 현재 청년들의 보편 모델은 수도권 4년제 대학 재학/졸업생이다. 언론은 이 평범한 청년상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이란 단어를 쓰는 데 위화감이 없다. 물론 단어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다. 문제는 뉘앙스다. 저 단어는 마치 대다수 ‘평범한 청년’이 수도권 4년제 대학생들처럼 외국어 시험을 치르고, 전공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공모전 수상을 위해 밤낮없이 활동하는 듯 보이게 만든다. 이렇게 거품 잔뜩 낀 평범함은 그 안에 속하지 못 한 사람한테 굴욕감을 준다. ‘남들 다 저 정도는 하는데 왜 난 못 할까’라며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좋은 대학 간 노력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 노력이 평범함으로 둔갑해선 안 된다. 그 평범함이 청년을 불행하게 한다. 계속 앞만 보고 달리도록 몰아세우고 휴식을 죄악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진짜 평범함이 들어설 자리를 빼앗아버린다. 평범함에 낀 거품을 걷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가 말하고 요구하는 평범함이 잘못됐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전문대 나온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얼마 남지 않은 청년기를 제대로 보내는 방식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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