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마스크와 헬라세포

기자 2023. 2.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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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됐다. 지난 3년간 마스크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됐다. 마스크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방역 도구였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기도 했으니까. 마스크 대란 때는 인간의 생명에는 무관심한 비정한 시장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가, 공적 마스크가 등장했을 땐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한 획일적인 인구관리의 현장이 되었고, ‘마기꾼(마스크+사기꾼)’ 같은 유행어를 통해서는 외모평가를 쉽게 하는 문화가 펼쳐지는 스크린으로 다가왔다. 한국인의 시민성과 공동체 의식이 드러나는 광장이기도 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나에게 마스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이 외화된 사물이었다.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방법으로는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을 수 없다는 깨달음과 나의 건강과 안녕을 당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믿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산처럼 쌓이는 마스크 쓰레기는 인간이 다른 종과의 연결을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지만 말이다.

문득 시작된 마스크 단상은 레베카 스클루트의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으로 이어졌다. 책은 신비로운 ‘헬라세포’를 둘러싼 의학의 역사와 그 세포를 남긴 헨리에타 랙스의 삶,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취재한 내용을 드라마틱하게 엮어 낸다. 1951년, 30대 초반의 흑인 여성 헨리에타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자궁경부암 치료를 받던 중 8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담당 의사는 그의 암세포를 채취해 조지 가이 박사에게 넘기는데, 가이는 이를 이용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세포 배양에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24시간마다 자생적으로 분열하고,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무한히 증식하는 불멸의 세포 헬라다.

이후로 헬라세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스클루트가 책을 마무리하던 2009년까지 약 60년 동안 20여t의 헬라세포가 생산되었고, 관련 논문 6만여편이 쏟아져 나왔다. 연구자들은 사람에게는 할 수 없었던 각종 실험들을 헬라를 대상으로 진행했다. 덕분에 소아마비백신과 자궁경부암백신을 비롯해 각종 난치병 치료제가 개발된다.

그러나 헬라가 얼굴과 이름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대체로 무시되었고, 그게 누구인지도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다. 심지어 헨리에타의 가족들조차 20년간 헬라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헬라로 인해 가능했던 다양한 과학적 성취에는 백인 중심 의학의 흑인에 대한 착취와 연구윤리 문제가 얽혀 있었다.

가족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건 헬라의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헬라가 그동안 공기 등을 통해 다른 세포들을 오염시켜 왔고, 전 세계 실험실에서 사용되는 대체의 세포들이 이미 또 다른 헬라세포가 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의사들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헨리에타의 DNA가 필요해졌고, 마지못해 가족들에게 연락하게 된다.

헬라는 수많은 생명을 살린 기적이다. 동시에 대지의 여신 가이아처럼 홀로 단성생식하면서 세계를 낳은 뒤 언제라도 다시 집어 삼킬 수 있다고 위협하는 태초의 어머니와도 같은 신화적 존재이기도 했다. 헬라는 ‘오염’을 통해 과학자들의 오만을 비웃고,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길을 찾아냈다. 마스크에서 헬라로 생각이 뛰어버린 건 다양한 의학적 지식을 통해 이미 나의 일부로 존재하는 헨리에타와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이라는 화두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처럼 과학적이면서도, 영적인 이야기가 필요한 시기 아닌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떠났다가 2년6개월 만에 경향신문 독자들께 다시 인사를 드린다. 그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연결과 의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족하겠지만 그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잘 부탁드린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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