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어린 신부의 남편 살해", 100년전 조혼 잔혹사

2023. 2. 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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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1921년 조선여인 두 명 부천 대부두 해안에 투신 13세·17세 꽃다운 나이에 '조혼 비관' 인생 망쳐 같은 해 강화도선 동침에 고통 겪던 女 방화사건 7∼8세 결혼하기도… '9세때 출산' 기사 충격적

만혼(晩婚)이 늘면서 저출산이 심화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렇게 지금은 만혼이 문제지만 100년 전에는 조혼(早婚)이 문제였다. 조혼은 수많은 여자 어린이들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남편을 죽이는 일도 많았다. 100년 전으로 돌아가 조혼이 빚은 비극을 찾아본다.

'인천 바다에 투신한 여자'라는 제목의 1921년 11월 16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부천군 대부두 해안에서 어떠한 조선 여자 두 명이 서로 껴안고 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당년 17세 되는 꽃다운 여자요, 또 한 여자는 동서(同壻)되는 13살 정(鄭)씨로 부모의 압제(壓制) 하에 조혼을 해서 아직 부부의 낙도 모르고 다만 일찍이 부모를 떨어져 남의 집에 와서 외로이 있는 것을 비관하고 항상 하는 말이 '언제든지 같이 물에 가서 빠져 죽어버리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의논하던 바 그와 같이 잔약(孱弱)한 여자의 마음으로 굳게 결심을 하고 자살을 하였는데 (중략) 참으로 우리 조선의 조혼 악습은 하루바삐 타파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더라."

1921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에도 조혼의 폐해를 다룬 기사가 보인다.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811번지 서간난(徐干蘭·16)은 금년 2월에 결국 성례를 하였는데, 동금(同衾; 동침)하기 시작하였더니 국부(局部)로부터 피가 나면서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가 없으므로 시집에 불을 놓으면 친정으로 쫓아 보낼 줄 알고 금년 3월 10일부터 8월 27일까지 수십 번을 집에 불을 놓다가 (중략) 이것은 전혀 어린 계집애를 10년이나 더 먹은 사나이에게 시집을 보내어 고통에 못 견디어 그리된 것이라고 서간난은 법률상으로는 방화(放火)이지마는 도덕상으로 보면 무슨 죄가 있다는가?"

결혼 생활이 지옥같아 살고있는 집에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경성부 남미창정 61번지 이백룡(李白龍)의 처 윤순이(尹順伊·16)는 밤마다 남편에게 받는 큰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서 잠시라도 모면해 보고자 지난달 10일에 시집에다 불을 놓은 죄로 (중략) 아직도 10살가량의 소녀와 같은 얼굴로 사실을 모두 시인하였는데 조용한 법정 안에 그 가늘고도 목이 메어 나오는 말소리는 한없이 측은스럽고 불쌍하여 법관 이하 다수한 방청자들까지 동정의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1922년 11월 8일자 매일신보)

통계를 봐도 조혼으로 인한 범죄가 잦았음을 알 수 있다. 1921년 9월 6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1921년 6월 말일 서대문 감옥의 조사를 보면, 여자의 범죄 중에 제일 많은 것은 살인이 208명이요, 간음이 110명 중, 그 사실을 보건대 대개는 본부(本夫)를 죽이고자 한 살인죄가 많은 즉, 이는 생각건대 조선에서는 여자를 너무 압박을 하며 혹은 조혼하는 폐단으로 이러한 범죄자가 많은 줄로 아는 바이나, 이로부터는 여자의 자유와 또 조혼 같은 것을 하지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감옥 과장은 말하더라."

도대체 몇 살짜리가 결혼을 했길래 조혼이라 했을까. 1910년 10월 12일자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2세, 13세는 논할 바가 없고 심지어 7세, 8세 남녀로 결혼하게 하는 자가 많으며 (중략) 모처에서는 9세 과부가 있고 또 가부(家夫; 남편)가 어린 까닭으로 비례(非禮; 예의에 어긋남)의 행동이 있어 조혼의 결과로 여자의 풍기(風紀)가 문란함이 적지 않으니, 당국자도 조혼의 누습(累習; 오래된 습관) 교정함이 급하다 할 수 있다."

1922년 4월 14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16세의 본처(本妻)가 7살 된 아이까지 낳고도 이혼 소송'이란 제목의 기사다. 16세에 7살 된 아이가 있다면 9살에 아이를 낳았다는 말인데, 참으로 어린 나이의 조혼이다.

조혼의 폐해로 인하여 이혼 소송 또한 격증되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1921년 7월 1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이혼 소송이 많은 그 원인은 전혀 조선 사람이 조혼하는 것과 또는 부모가 압제로 결혼시키는 것과 이외에도 남자가 첩을 두는 것이며, 여자가 남자보다 연령이 많은 것과 또는 여자의 지식이 현저히 발전되지 못한 것 등 이상의 여러 가지가 이혼 소송을 많게 하는 원인이라 하겠다."

이런 조혼의 폐해가 사회적 문제가 되자 조혼을 없애자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1923년 1월 3일자 동아일보자에 미국 '와 대학' 출신 김애스터 양의 주장이 실려있다. "나이가 찬 후에 결혼을 시키고 할 수 있는 대로 교육을 받은 후에 결혼을 하며 또는 경제상 힘이 있은 후에 결혼을 하고, 그 다음은 가정에 자유, 평등주의를 실행하여야 우리 가정도 재미있는 가정이 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겠습니다. 우리 조선도 점점 발전되는 모양인 즉, 우리 조선 형제들은 이러한 점에 많이 유의하여 많은 효과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조선총독부는 민사령(民事令)을 개정해 결혼할 수 있는 연령을 설정했다. "이번의 법령 개정 중에서 제일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종래 신고가 없던 조선의 결혼에 대하여 신고를 하게 된 것이라. 이로부터 결혼 능력자의 연령을 일본의 형행법과 마찬가지로 남자 17세, 여자 15세로 제정한 것이라. (중략) 결혼 연령은 조선 관습에는 종래 남자보다도 여자의 편이 나이가 많은 것은 전혀 폐풍(弊風)이라 (중략) 어쨌든지 개정법이 발포되면 조선의 결혼법은 종래의 폐풍 많던 것이 아주 일소(一掃)될 것이라더라." (1922년 11월 30일자 매일신보)

그렇다고 조혼의 폐해만 있겠는가. 만혼(晩婚)이나 비혼(非婚)이라고 폐해가 없겠는가. "가정에 자유, 평등주의를 실행하여야 아름다운 가정이 되겠습니다"라는 김애스터의 이야기처럼, 남녀가 아닌 인간 자체에 대한 자유와 평등주의가 실행되어야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어디 가정에서만 그렇겠나. 정치와 경제에서도 자유와 평등이 실행되어야 비로소 행복한 사회가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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