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제2의 창작’ 번역, 제대로 된 사회적 평가는 언제쯤

한겨레 2023. 2. 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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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번역가의 오류는 눈에 도드라진다. 잘 안 읽히는 번역서를 만나 독서에 몰두할 수 없으면 번역가는 저절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런가 하면 번역가의 노고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 원작에 충실하면서 매끄럽게 읽히는 문장이 완성되면 번역자는 홀로 흡족해할 뿐, 그 문장이 잘 읽힐수록 독자는 후딱 읽고 지나갈 것이다. 독자가 독서에 몰입할수록 번역가는 잊힌다.
클립아트코리아

백선희 | 프랑스어 번역가

나는 번역가다. 헤아려보니 번역가로 살아온 세월이 25년쯤 된다. 책에 따라 다르지만 한해에 대여섯권쯤 계약한다. 이른 새벽부터 작업하는 편이고, 거의 온종일 일한다. 이따금 하루 몇시간씩 일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감이 임박하면 12시간 이상 일할 때도 있고, 네다섯시간 일할 때도 있어 평균내기가 어렵다. 그저 눈 떠서 잠들기 전까지 번역하는데, 밥 먹고 산책하고 사람 만나는 일이 사이에 끼어들 뿐이다.

번역가는 프리랜서로 저마다 출판사와 개별 계약을 체결하기에 번역가의 노동조건을 통틀어 말하긴 힘들지만, 어쨌든 온종일 강도 높게 일하지 않고 오롯이 번역가로 먹고살기 어렵다는 건 사실이다. 작업량 많은 번역가 몇이 만난 적이 있는데, 모두 거의 온종일 책상에 붙어 지낸다고 입 모아 말했다.

한권의 번역서가 출간되기까지 번역가는 같은 책을 최소한 세번은 읽는다. 때로는 네번, 다섯번까지 읽기도 한다. 그것도 해부하듯이 꼼꼼히 읽어야 한다. 텍스트를 이루는 낱말과 문장과 단락을 쪼개어도 읽고, 빈 행간도 읽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손에 메스나 현미경을 들고 작업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텍스트를 해체하듯 읽고 나면, 저자의 원래 작품에 최대한 가깝게 다른 언어로 써야 한다. 원작을 구성하는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를 옮기는 건 물론이고, 작가 고유의 문체도 살려야 하고, 원작이 지닌 ‘자연스러움’까지 재현해내야 한다.

텍스트라는 구조물을 해체해 언어를 바꿔 원작과 가장 닮도록 재현하는 것, 이것이 번역가의 일이다. 그러자면 텍스트의 구조를 세세히 파악해 망가뜨리지 않고 잘 해체해야 하고, 잘 재현하려면 두 언어와 문화의 차이도 잘 알고 저자의 논리를 꼼꼼히 좇아야 한다.

그래서 번역가는 새 작품을 작업할 때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저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저자와 잘 내통해야 좋은 번역본이 나온다. 번역해야 할 저자의 주장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을 때조차 번역자는 자아를 버리고 저자에 빙의해야 한다. 동의하지 않는 마음으로 번역하면 어휘 선택에서 미묘한 삐딱함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번역가의 오류는 눈에 도드라진다. 잘 안 읽히는 번역서를 만나 독서에 몰두할 수 없으면 번역가는 저절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런가 하면 번역가의 노고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저자가 수식어를 잔뜩 달아 길게 써놓은 한 문장을 번역할 때 번역자는 그 문장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매끈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레고 조각 맞추듯이 말을 골라 이리저리 끼워 맞춰보고 다듬느라 오래도록 공을 들인다. 그러다가 원작에 충실하면서 매끄럽게 읽히는 문장이 완성되면 번역자는 홀로 흡족해할 뿐, 그 문장이 잘 읽힐수록 독자는 후딱 읽고 지나갈 것이다. 독자가 독서에 몰입할수록 번역가는 잊힌다.

번역가는 잊혀야 사는 존재다. 적어도 독서의 순간에는 그렇다. 독서가 끝난 뒤 간혹, 번역서인데 왜 이렇게 잘 읽혔을까, 하고 문득 번역가의 존재를 떠올리는 경우도 있긴 하다. 혹은 언어를 알지 못해서 읽지 못하던 책이 번역됐을 때 번역가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독자도 간혹 있다. 며칠 전 내게 낯선 독자가 메일을 한통 보내왔다. “<폴 발레리의 문장들>을 매우 기쁘게 읽었습니다. 번역 문장이 수려해서 놀랍고 또한 기뻤습니다.” 번역작업 덕에 책을 읽게 돼 기뻐하는 이런 독자들이 번역가를 나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그런데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여전히 야박하다. 몇해 전, 월세방을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인 어느 여성 시인이 홍보대사가 되겠다며 호텔 방을 1년간 쓰게 해달라고 요청한 일로 사회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때 어느 평론가가 그 시인을 옹호하며 한 말이 기억난다.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할 훌륭한 시인에게 ‘출판사 번역일이나 시키고, 심지어 곰인형 눈알 붙이기 같은 수준의 막노동일 같은’ 걸 시켜서야 되겠느냐는 취지의 말이었다.

번역일에 붙은 조사 ‘이나’에는 번역을 아무나 할 수 있는 하찮은 노동쯤으로 치부하는 시각이 담겨 있다. 혹은 흔히들 번역가를 작가보다 못한 존재쯤으로도 생각해서, 거의 반평생을 번역가로 사는 내게 이따금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번역은 그만하고, 책을 쓰라”고. 이런 말에도 번역가를 용이 못 된 이무기쯤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실려 있다. 번역가는 무엇이 채 못된 존재도 아니고, 번역은 무엇이 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번역가는 번역가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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