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국민연금의 신(新) 관치 금융, 관료들의 욕망 때문은 아닌가

정해용 기자 2023. 2. 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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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용

“예전에는 금융위원회나 하던 관치(官治) 금융을 이제는 국민연금이 하고 있다. 왜 연금이 이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국민연금 최고경영진들이 KT, 포스코(POSCO홀딩스) 등 소유분산 기업(주인 없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공개적인 인사 개입을 계속하는 상황에 대해 한 전문가는 ‘관치금융’이라는 단어로 이를 정리했다.

관치금융은 금융당국(정부)이 금융회사의 모든 사업영역은 물론 최고경영자(CEO)의 인선과 퇴임 등에까지 간섭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말한다. 과거 금융위원회가 선후배 관료 출신의 인사를 금융지주 등 주요 금융사의 회장으로 내려보내는 식의 관치는 굉장히 흔한 모습이었다. 이런 관치를 미화하며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도 있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글로벌시장이 큰 위기를 겪는 특수 상황에서는 이런 관치가 효율적일 수 있지만, 대부분 관치금융은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많다는 것에 대다수 전문가가 동의한다. 관치금융이라는 용어까지 나올 정도로 국민연금의 행보가 이례적인 이유는 특정 기업의 특정 경영자를 목표로 두고 공개적인 반대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은 지난해 12월 27일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KT 이사회에서 연임이 결정된 구현모 대표에 대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라며 반대 의견을 발표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출범한 1999년 이후 특정 기업 CEO 인사에 본부장 명의의 의견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이에 앞서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도 지난해 12월 8일 간담회에서 “소유 분산기업에 대한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투자책임 원칙)도 지배구조가 확고한 기업과 다른 측면에서 강화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라는 입장을 밝히며 KT, 포스코 등 소유 분산기업에 대한 지배구조 개선을 언급했다. 2021년 말 기준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 보유한 기업은 264개, 10% 이상 보유 기업은 45개다. 국민연금이 연임을 반대한 구현모 KT 대표는 취임 후 영업이익을 20% 넘게 올렸고 주당 배당액도 40% 늘린 경영자다.

국민연금의 이런 입장이 금융위원회와 대통령실의 기류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대통령실이 소유분산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투명성 강화를 금융위에 요구했고 금융위는 금융지주회사 등에 대해 중대한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최고경영자(CEO)를 직접 징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도 했다. 국민연금의 행보가 금융위원회를 거쳐 대통령실로까지 확산하면서 소유 분산기업의 지배구조가 국정 현안이 됐다는 취지의 보도였다.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감한다. 그러나 특정 기업을 직접 언급하며 해당 CEO를 몰아내야 한다는 식의 공식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미국, 일본, 네덜란드 등 세계 주요 연기금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상식을 벗어난 국민연금의 행보에서 관치의 그늘이 읽히는 것은 금융위원회 출신 관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다. 그동안 국민연금 이사장, 주요 금융지주 회장, 기타 소유분산 공기업에 금융 관료 출신 인사들이 지속해 임명돼왔다. 2009년 12월 국민연금 이사장에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이 임명됐었고 지난해 9월에는 김태현 금융위 전 사무처장(차관보)이 이사장이 됐다. KB금융지주(KB금융)는 2010년 임영록 전 재정경제부 2차관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NH금융지주도 2013년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을 회장으로 선임했었다.

이 밖에 김만제 전 포스코 회장(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94년 취임), 박병원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재정경제부 1차관‧2007년 취임), 이석채 전 KT회장(재정경제원 1차관‧2009년 취임), 김용환 NH농협금융지주 회장(금융위 상임위원‧2015년 취임) 등이 금융관료 출신들이다. 올해 NH금융지주 회장으로 선임된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도 재정경제부, 기획재정부, 금융위 등을 거친 금융 관료다.

국민연금의 최근 행보가 비단 특정 기업의 지배구조 이슈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국민연금의 대표이사 선임 반대로 지배구조 리스크가 발생하자 KT는 손자회사인 케이뱅크의 상장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고 사실상 올해 상장을 철회했다. 한때 기업가치 8조원에 달하며 유가증권시장에서 기대가 컸던 국내 최초 인터넷 은행은 상장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가뜩이나 마켓컬리 등 대어(大魚)급 기업들의 상장 철회로 침체를 겪는 우리 증시에 국민연금이 찬물을 끼얹었다.

다수의 시장 관계자들은 현 정부가 금융에 대한 전문성과 이해도는 떨어지지만 절차적 요건 등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률 전문가들이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이기에 대통령실에서 과거처럼 특정 친정부 인물을 주인이 없는 소유 분산 기업의 수장(首長)으로 앉히려는 시도는 하지 않지만 ‘3연임은 안 된다’는 식의 절차에 집착하고 있다고 본다. 국민연금 등 금융관료들이 주도하는 조직에서 소유 분산 기업의 지배구조가 투명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큰 과(過)가 없는 CEO들을 교체하면 이들의 빈자리는 금융관료들이 차지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이 같은 이해관계 때문에 급하지도 않은 소유 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투명성을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에만 50조원(47조7000억원‧11월 말 기준) 가까운 기금 손실을 봤고 고갈 시기가 앞당겨져 현재 보험료율을 최대 15%까지 올려야 되는 것 아니냐는 논의까지 나온 상태다. 금융위와 국민연금이 가뜩이나 침체한 자본시장에 고통을 가중하고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키는 일을 더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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