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이 시대의 진정한 멘토”

2023. 2. 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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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진정한 어른이 없는 시대다. 참 어른이 나오기도 어렵다. 자칫 꼰대가 되기 쉬운 탓이다. 그러니 어른들이 숨어버린다. 당연히 나서야 할 때에도 봉변 당할 것을 우려해 침묵한다.

젊은 세대는 나이든 사람의 진정한 어른된 모습에서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간 관계가 이렇게 파편화되면 사람에게 감화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이런 시대에 진짜 어른이 나타났다. 아니, 원래 있었는데 우리가 잘 몰랐을 지도 모른다. 찐어른 김장하(79).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 기부하면서 사람들을 돕는 어른이 아니다. 그의 행적은 최근 MBC경남이 공개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2부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 선생님 좀 알려주세요”…도움 받은 이들 ‘한 목소리’

김장하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30여 년전 기자를 시작하면서 김장하가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한 김주완 기자(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는 퇴직 후 본격적으로 인간 김장하를 취재한다. 그 여정을 담은 것이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다.

김 기자는 무작정 김장하를 찾아간다. 지난해 5월까지 김장하가 일했던 경남 진주시 동성동 소재 남성당 한약방으로 가 그가 좋아하는 야구 이야기부터 건넨다. 롯데에서 NC로 갈아탔다고 했다. 야구 이야기를 할 때는 환한 얼굴을 하다가 “몇 명에게 장학금을 줬나요”라고 물어보면 선생은 입을 굳게 닫아버린다. 인터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김 기자는 외곽을 파고 들었다. 김장하에게서 장학금을 받은 사람과 이웃 주민, 김장하가 관여했던 극단 등 사회·문화단체 관계자들을 만났다.

주변 사람들의 취재가 이렇게 잘 된 적은 처음이라고 김 기자는 말한다. 다들 김장하라는 어른은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걸 가지고 인터뷰에 응했다. 그가 경남 사천시 용현면에 살 때 한 이웃주민은 “김약국에 손 벌리면 항상 돈을 빌려줬어. 우리 금고처럼 김약국집에서 돈을 갖다 썼지”라고 회고했다. 남성당 한약방 옆 자전거 상을 30년 넘게 한 사람은 “김장하 선생님이 30년 간 집세를 한번도 안올렸어요. 코로나 때는 집세를 내렸지”라고 말했다.

김장하 “아픈 사람한테서 번 돈, 사회 환원은 당연”

김장하는 지난 1963년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서 한약방을 개원했다. 그의 나이 19살 때다. 그러다 73년 경남 진주시 장대동으로 이전했고, 77년에는 동성동 현 위치로 이전 개원했다.

“내가 약방에서 머슴살이를 했지. 62년 신문에 한약사 시험 공고가 났어. 한약종상에서 3년 이상 한약을 취급한 실무 종사자는 자격이 된다고 해서 18살 때 접수를 했다.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1년 후에 개업하라고 해 이듬해에 개원했지.”

김장하의 한약방에는 사람들이 항상 몰렸다. 다른 한약방보다 싸게 팔았다. 하지만 직원 월급은 다른 약국에 비해 2~3배가 높았다. 하루에 800명이 몰려 한약을 800제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오전과 오후 다른 색깔의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야 했다.

김장하는 이렇게 한약방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많은 돈을 사회에 헌납했다. 수백 억원의 돈을 사회에서 필요한 곳에 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다. 웬만해서는 걷고, 먼 곳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특히 교육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진주고, 대아고 등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대학까지 지원했다. 지난 1984년에는 40세의 나이로 명신고교를 세워 91년에 국가에 헌납해 공립학교로 전환시켰다.

학교를 설립하고 나니 교직원 인사청탁이 쇄도했다. 이때 김장하는 교직원 선발의 3대 원칙을 세웠다. ▷친척 한 명도 안쓴다 ▷돈을 받고 채용 안한다 ▷권력에 굽히지 않겠다 등. 이 세 가지만 지키면 좋은 교사들을 뽑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명신고 이사장 시절에는 모의고사를 본 날마다 저녁에 교사들을 위한 회식을 열었다. 당시 그는 교사들에게 소갈비를 사주며 “절대 학부모에게 손 벌리지 마세요”라고 했다.

“내가 돈을 번 게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그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호화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거다.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차곡차곡 모아 사회에 환원했다”

“부담 갖지 말고 하고싶은 거 해라”…우리의 ‘든든한 빽’

김장하가 이웃을 돕는 방식은 인간적이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기독교의 자선(charity) 개념과도 유사하다. 주는 사람은 흐뭇해지면서 정신 부자가 되고, 받는 사람은 비굴함을 느끼지 않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다. 불교의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 개념과도 통한다. 내가 내 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고 남을 도와준다는 의미다.

김장하 장학생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등록금) 얼마 나왔어?’ 하고 물어보시고 돈을 세어 주시고. 전혀 위축되지 않게 티를 내지 않으셨다”, “말을 많이 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부담 가질까봐. 학교에서 어려운 게 없나 물어보시고, 간섭 안하고 니가 원하는 걸 해라고 하셨다”, “무슨 일을 해도 든든하게, 떳떳하게. 이사장님(김장하)이 우리들의 훌륭한 빽이다. 돈이 아니고”….

김장하 키드인 ‘예쁜 꼬마 선충 전문가’ 이준호 서울대 자연과학대 교수는 “(김장하 선생님은) 어떤 지침을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오신 그 과정 자체가 삶의 지표 같은 분”이라며 “내가 ‘학생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선생님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김장하 장학생 중에는 83학번 문형배 헌법재판관(대아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같이 잘 된 사람도 있지만 평범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중 한 명이 “장학금을 받고 특별한 사람이 못돼 죄송합니다”고 하자 김장하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고 했다.

우리의 ‘든든한 빽’“돈은 똥과 같은 것…밭에 뿌리면 좋은 거름 된다”

이쯤되면 김장하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우리 시대 어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장학생들이 너무 고마워하면 “혹시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고 말했다.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인 진주 형평운동의 선구자 강상호의 묘에 비석을 세우는데 돈을 댄 사람도 김장하다(비문에는 작은 시민으로 돼있다). 김장하는 차별 금지, 평등 사상을 강조하는 형평운동을 이어받아 새로운 차별을 없애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남녀간, 장애인·비장애인간, 빈부간 차별이 없어지지 않아 안타깝다는 그다.

이런 김장하를 두고 일각에서는 “감투 하나 쓰려고 그러냐”, “돈지랄 한다”, “빨갱이 짓하고 있어”, “찌그러져 있어” 등 원색적인 비난과 마타도어들이 있기도 하다. 이에 김장하는 “결과는 세월이 증명한다. 화를 낼 필요가 없고, 변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묵묵히 참고 견딘다”며 “앞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김장하의 초등학교 동창인 70년 지기 최관경 부산교육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이 친구의 삶이 부럽지 않다. 저렇게 살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라면서 “화를 절대 안내는 비결이 뭔지 궁금하다. 장하는 단점 없는 것이 단점이다”고 말했다.

김장하는 “돈이란 게 똥하고 같다.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 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힘이 된 것은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평가는, 아무도 칭찬하지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했으면 한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싶다”고도 했다.

‘흔들리지 않는 거목’ 김장하는 등산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인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처럼 계속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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