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서 폭파’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우표[우정이야기]

2023. 2. 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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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우정사업본부 제공



1889년 1월 5일 서울 효제동에서 출생. 여덟 살 때부터 부친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돕기 시작. 열네 살 때 대장간 일 시작. 열여섯 살 때 신군야학 설립.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청소년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본인도 공부함. 열여덟 살이 되자 동흥야학 설립. 동흥야학은 서울 종로구 효제초등학교의 전신. 스물세 살이 되던 1912년에는 철물점 개점. 훗날 철물점이 크게 번창해 독립항쟁에 쓰일 자금을 마련하는 데 보탬이 됨. 이듬해에는 대한광복단 조직.

올해로 순국 100주년을 맞는 김상옥 의사의 어린 시절 일대기다. 우정사업본부는 1월 27일부터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64만 장을 발행한다. 기념우표에는 김상옥 의사 초상화와 의거 당시 장면이 담겨 있다.

김상옥은 1913년 대한광복단 조직 이후 독립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한 인사다. 1916년에는 조성헌병대를 기습했고, 1919년 3·1운동에도 참여했다. 같은해 4월 항일비밀결사조직 ‘혁신단’을 통해 혁신공보를 발행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40일간 고문을 당했다.

서른한 살인 1920년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일제 고관 처단에도 나섰다. 김원봉, 조소앙과 교류했고 김구, 신익희 등과 함께 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도 계획했다고 한다.

1922년 김상옥 의사가 서울 용산구 후암동으로 잠입했다. 권총 4정과 폭탄 6개, 실탄 800발을 챙긴 상태였다. 본격적인 거사 활동은 이듬해 1월 시작했다.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김상옥 의사의 의거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최소 5명이 상처를 입었다. 건물 유리창이 깨지고 게시판과 벽이 파손됐다. 당시 민심의 동요가 두려웠던 조선총독부는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경력과 병력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나섰다. 취재 제한을 둬 언론마저 통제했다.

닷새 뒤에는 일제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일제 형사들의 기습을 받았다. 김상옥 의사는 일제 형사들을 피해 남산을 종단해 탈출했다. 당시 일제 군경 1000여명의 포위를 뚫었다고 전해진다.

김상옥 의사는 이후 왕십리, 수유리, 효제동으로 은신처를 바꿔가며 몸을 숨겼다. 1923년 1월 22일 일제 군경 1000명이 다시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가옥 5개를 옮겨가며 저항했다. 최소 16명의 일제 군경을 사살했다고 전해진다. 김상옥 의사는 3시간가량 전투를 벌이다가 남은 실탄 1발로 자결했다. 순국 당시,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정부는 1962년 김상옥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원진 전국사회부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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