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스민 그림을 읽다[김정수의 시톡](18)

2023. 2. 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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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시인 신간 <미술관 점경(點景) 일지>
김용옥 시인(왼쪽)과 표지. 시로여는세상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세잔의 아틀리에’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덕길에 있는 소박한 집이었지요. 1층에는 아트숍과 폴 세잔의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실, 2층에는 작업실이 생전 그대로 보존돼 있었습니다. 작업실에는 사과 같은 정물과 이젤, 기다란 작업용 사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물감이 묻은 작업복과 외투, 모자와 화구가 담긴 가방도 그대로 있어 마치 세잔이 잠깐 외출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장면을 시로 쓰고 싶었지만,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쓰겠지요.

19편 시에 다양한 미술작품 표현

1982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김용옥 시인(1954~)의 여섯 번째 시집 <미술관 점경(點景) 일지>는 제목이 암시하듯, 도슨트 경험을 시로 쓴 것입니다. 도슨트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서 전시작품을 설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 시인은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겠지요. 오랜 교직 생활을 접고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은 이번 시집의 1부 19편에 작가와 미술작품(전)을 부제로 달았습니다. 홍일표 시인은 “시로 읽은 미술의 차원이 아니라 작품 너머의 세계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관점의 시편들”이라 평했습니다.

부제 없이 읽어도 시적 완결성에는 문제가 없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미술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면 시는 한 차원 더 깊은 이해와 감상의 자리를 슬쩍 내어줄 것입니다. 풍경화 등에 사람이나 동물, 물건 따위를 그려 넣어 정취를 더하는 점경(點景)처럼 언급한 작가들의 작품을 일일이 찾아봐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면 말입니다. 19편의 시는 회화, 사진, 판화, 목탄, 영상, 설치미술, 조각 등 다양한 미술 분야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술에 대한 시인의 폭넓은 안목과 실력이 단순히 회화에 머물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의 부제로 언급한 김기라의 ‘플로팅 빌리지’, 박형근의 ‘낚싯바늘’, 최경선의 ‘그물 짜는 시간’, 지지수의 ‘Father Still Life’, 송지혜의 ‘자정의 시간’, 윤석남의 ‘봄은 오려나’, 김억의 ‘생명과 평화의 땅 대추리 1’, 홍기원의 ‘아파셔나타’, 정보영의 ‘일어서는 빛’ 등의 작품은 한결같이 “성장의 한계와 발전의 왜곡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자본주의적 삶, 현실 참여적인 목소리를 띤 역사의 현장, 관계와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간과 장소”(신상조 문학평론가의 시집 해설)라 할 수 있습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이를 시로 쓰는 시인은 의외로 많습니다. 일례로 고통스러운 삶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시만 해도 강인한의 ‘폭탄을 두른 리본’, 여정의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박연준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자화상’, 임효빈의 ‘깃털의 클리셰’, 고주희의 ‘프리다와 사슴’ 등이 있습니다. 언급한 시 외에도 많겠지요. 미술은 시에, 시는 미술에 새로운 영감을 주고 상호 교류를 통해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길 위의 소란들’에 이름을 달다

시인은 경기도 시흥 마유로와 안산시 단원구 화정천로, 서울시 여의대로와 마포대로 그리고 “청계산, 수리산, 영장산을 거쳐 수도권 외곽순환도로를 다 지나야 닿는 호수 습지 옆 미술관”(이하 ‘시인의 말’)을 돌며 7년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언어가 아닌 시각예술의 온갖 장르와 담론 속에서 표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 시대 젊은 작가들과 보낸 반란, 충돌, 슬픔, 반짝임, 그늘, 물기”를, “서늘하고 다정했던 풍경의 점경”을 하나씩 언어로 꺼내 길 위의 소란들에 이름을 달아준 것이라 합니다. 그 결과물이 이번 시집이겠지요.

시인이 어떻게 미술작품을 시의 여백에 담았는지 살펴볼까요. ‘김기라, 플로팅 빌리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여는 시 ‘물왕은 없다’는 경기도 시흥의 물왕호수를 시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녁 무렵 호수를 찾은 시인은 30년 전을 회상합니다. 올해 저수지에서 호수로 옷을 갈아입은 물왕호수는 화려한 야경과 산책코스, 멋진 카페와 숨은 맛집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황톳길 타박타박 걸어가 머물”던 곳입니다. ‘황톳길’이 의미하듯, 당시 이곳은 시골이었지요. 지금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한결 여유가 생겼지만, 그때는 몹시 춥고 배고팠습니다. 그래도 “빛나던 청춘”이 있었지요. 차창에 핀 눈꽃을 닦아내던 시인은 감상에 젖습니다. “시간의 물기”, “어둠의 눈시울” 같은 문장이 암시하듯, 시인의 마음이 왠지 허전합니다. 그렇다면 시의 부제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플로팅 빌리지’는 1시간 분량의 8가지 영상물을 통해 불확실성 시대에 부유하는 개인의 역사와 삶을 조명한 전시입니다. 고달픈 삶과 사회부조리를 담은, 서울시 환경미화원이었던 위재량의 시집 <가슴으로 우는 새>에서 모티브를 얻어 집도 없이 떠돌던 화가의 삶이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끊임없이 낯선 번지를 기웃거리는 시인의 삶과 물왕호수의 과거와 현재를 씨줄로, 가난한 화가의 삶과 고단한 하위직 공무원의 애환을 날줄로 직조한 시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시 ‘집으로 가는 길 -최경선, 그물 짜는 시간’은 “사내가 맨바닥에서 낮잠에 든” 모습과 사내 옆에서 똑같이 “머리를 맞대고” 잠든 “늙은 도사견”, “보랏빛 휘장을 들치고 가만히 드는/ 오후 네 시 무렵의 햇살”과 “분홍, 회색 꽃 무더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시인은 낮잠 너머에서 “찰나의 생”을 포착합니다. 맨발로 잠든 사내를 통해 화가는 ‘그물을 짜는 시간’을, 시인은 ‘집으로 가는 길’을 떠올립니다. 그 사내를 화가는 어부로, 시인은 이 땅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로 파악한 것이지요.

여행을 좋아하는 시인은 “세상 밖 캄캄한 절벽에서 누군가”(‘가까스로 문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나 혼자 “몰입의 시간”(‘완고한 내 널 속에’)을 갖고 싶은 날이면 집을 나서 “어느 낯선 거리”(‘수프레 강변에 누워’)로 몸을 숨깁니다. 시가 또 그렇게 몸에 스며들겠지요.

시인의 말



하늘에서 울다
배재경 지음·작가마을·1만원

우리 시대에 아직도
이런 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인왕
김선미 지음·파란·1만2000원

한 손을 들고 하늘을 본다.
손은 달걀 하나를
쥔 것처럼 가볍게.
이것은 어제 했던 동작이다.



토성에서 생각하기
함태숙 지음·문학의전당·1만원

여름에 묶은 원고를 겨울에 만져본다.
어디를 유영하고 있는지 나는 이미 토성에
이주한 것 같다.


고래, 52
이선정 지음·달아실·1만원

뭉친 고름을 찢었다.
터트리고 보니
울음주머니였다.
혹여 상처가 아문다면
그대가 함께
울어준 덕분이다.



바람의 손톱엔 붉은 매니큐어
김진열 지음·시산맥·1만원

충족되지 못한 허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일, 가슴에 품은 이빨이 날카롭고 단단하여 부드러워지지가 않는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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