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필의 귀거래사] 토끼에게 물어본 새로운 세상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2023. 2. 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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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기다리던 설날이던가.

며칠 전부터 집 안을 청소하고 제사용품이며 선물, 새 옷과 신발을 사고 아버지는 할머니께 빳빳한 세뱃돈을 준비해드리곤 했다.

그러나 성불하기 전 부처의 공덕을 기록한 <본생경> 의 활활 타는 불 속에 자신의 몸을 던져 배고픈 나그네에게 소신공양했다는 토끼 이야기는 놀랍기만 하다.

그 토끼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달 속에 계수나무와 함께 담아둔 것이 옥토끼의 전설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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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끼
이야기 소재로 큰 사랑받아와
격암유록 속 토끼가 향한 청림
뿌린대로 거두는 농촌 말한듯
이기주의·무한경쟁 삶 벗어나
이웃 돌보며 품위 있는 한해로

얼마나 기다리던 설날이던가. 며칠 전부터 집 안을 청소하고 제사용품이며 선물, 새 옷과 신발을 사고 아버지는 할머니께 빳빳한 세뱃돈을 준비해드리곤 했다. 물을 데워 묵은 때를 씻고 낮에 산 새 신을 밤새 몇번씩이나 신어보노라면 어른들은 신이 빨리 닳는다고 걱정하곤 했다. 차례를 지내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한 후에는 흰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세배하러 다녔지. 60여년 전 어릴 적 이야기다.

설날 풍경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새해는 무슨 띠의 해이며, 띠 동물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운수를 점치고 생활 교훈과 행동 원리를 얻는 사람들이 있다. 12간지 동물 중에서 올해는 계묘년(癸卯年) 토끼의 해다. 토끼는 민첩하고 영특하며 순한 동물일 뿐 아니라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마을 주변 야산에서 살기 때문에 나무 그루터기에 걸린 토끼를 기다린다는 ‘수주대토’,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등의 숱한 금언과 속담 그리고 ‘수궁가’와 ‘벅스버니(Bugs Bunny)’ 같은 판소리와 동화·만화 등 다양한 소재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연약한 토끼가 무서운 호랑이에게 용감하게 도전해 뜨거운 돌멩이를 먹이거나, 얼어붙은 강에 꼬리를 담그도록 골탕 먹인 이야기를 들으면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신나고 통쾌했던가!

하지만 자라의 꾐에 빠져 용궁으로 갔던 토끼가 간을 두고 왔다는 거짓말로 육지로 돌아와 기뻐 날뛰다가 그물에 걸려 다시 말을 바꾸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보면 측은한 생각도 든다. 이솝우화의 토끼도 마찬가지다. 경기 중 상대를 얕본 토끼가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거북이가 벌써 결승점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로 꾸준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교훈이지만 약자를 백안시하는 토끼의 오만함이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성불하기 전 부처의 공덕을 기록한 <본생경>의 활활 타는 불 속에 자신의 몸을 던져 배고픈 나그네에게 소신공양했다는 토끼 이야기는 놀랍기만 하다. 그 토끼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달 속에 계수나무와 함께 담아둔 것이 옥토끼의 전설이 됐다고 한다.

토끼의 또 다른 모습은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Wonderland)로 데려간 시계를 든 흰토끼처럼 시대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소설의 배경인 18세기 영국은 기술 발전과 산업혁명, 제국주의 정책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성과를 이뤘으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로의 전환, 전통적 가치와 혁신, 허영과 위선이 공존하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앨리스란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방황하는 세상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잊고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때는 어려운 살림에도 부모형제며 이웃간에 얼마나 정겹게 살았던가? 혼자 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두레나 품앗이를 하고 관혼상제 같은 대소사는 계를 모아 서로 돕고, 명절에는 꽹과리를 치며 집집이 찾아가 액운을 빌어주는 지신밟기를 하면서 마음만은 편하게 살았다. 남사고가 쓴 <격암유록>에 의하면 ‘토끼가 푸른 숲으로 달려가는 것을 뒤따르는 게 살길(須從白兎走靑林·수종백토주청림)’이라고 한다. 흘러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불신과 반목,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기 생각만 가지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이웃과 더불어 인정과 의리 그리고 품위와 격조가 있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새해가 되면 좋겠다. 흰토끼가 달려가는 청림이 어딘지 모르겠으나 뿌린 대로 거두는 산 좋고 물 맑은 농촌이 그런 곳이 아닐까?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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