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매화꽃 필 때를 기다리며

양민주 시인·수필가 2023. 2. 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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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주 시인·수필가

겨울은 왠지 쓸쓸하다. 겨울잠을 자는 대지와 추위 때문이다. 겨울은 삼한사온(三寒四溫)의 날씨라지만 기후변화로 황사가 심한 삼한사황(三寒四黃)의 날씨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미세먼지에 모두가 건강을 염려해야 할 지경이 됐다. 설날 지나 입춘을 바라보는 시기에는 봄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 복어 배처럼 부푼다.

나는 매화꽃을 좋아한다. 신문에 이상기온으로 말미암아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기사가 나는 날부터 나는 매화꽃이 만발한 봄을 기다린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아닌 진정한 봄을 기다린다. 벌과 나비를 앞세우고 방긋방긋 웃는 매화꽃 활짝 필 그때를 그리움으로 기다린다. 사군자의 하나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굳은 기개로 피어나는 하얀 꽃 때문만은 아니다.

어릴 적 시골집 마당 모퉁이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감나무와 마주하여 매화나무도 한 그루 서 있었다. 겨울이 되면 그곳엔 따뜻한 볕이 들었다. 아버지는 마구간에 묶어둔 일 잘하는 암소를 몰고 나와 감나무에 묶어두고 볏짚을 주셨다. 소는 땅에 엎드려서 등으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종일 짚을 먹고 되새김질했다. 그러면 나는 소의 등을 긁어주기도 했고 두 손으로 뿔을 잡고 이마를 맞대어 보기도 하였다. 봄을 기다리는 나목의 감나무와 매화나무, 그리고 소가 엎드려 있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정겹다.

아버지는 매화나무를 애지중지하셨다. 봄바람이 불어와 대지를 깨우면 매화나무는 잠에서 깨어나 자줏빛 꽃망울을 단다. 따사로운 봄 햇살 받으며 꽃망울을 젖빛이 도는 봉오리로 키운다. 이러한 풍경은 매화꽃이 활짝 필 때까지 시나브로 이어진다. 매화 꽃잎이 떨어지고 잎이 나오면 매실이 앙증맞게 달렸다. 열매가 어느 정도 자라면 잎에는 비리가 붙어 쪼그라들고 열매에는 벌레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냥 그대로 두셨다. 열매가 메추리알 크기만큼 자라면 농번기가 왔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를 몰고 들일을 나가셨다. 일하는 틈틈이 밭머리에서 소주를 드셨는데 소주잔에는 입으로 깨문 매실이 동동 떠 있었다.

아버지는 일의 고단함을 벌레 먹은 매실주로 달래며 희망의 봄을 즐기고 계셨다. 매실주에 취해 불콰해진 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아무리 애주가라고 해도 그때엔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도 봄이면 아내가 매실청 담그려고 사 온 매실을 자루에서 한두 개 꺼내어 아버지 흉내를 내어본다.

나무에 매달린 매실은 마냥 노랗게 익어갔다. 맛있을 것 같아 따 먹어보면 시고 떫은 맛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 몸으로 체득되는 맛이다. 익은 매실은 눈으로 보는 즐거움과 상큼한 향기를 준 뒤 여름 장마에 땅으로 떨어진다. 꽃이 피고 열매가 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절창의 아름다움이다.

매화나무는 나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일터인 조그만 갤러리에 김해 출신 문인화가 아석(我石) 김종대의 묵매화를 비롯하여 매화 그림을 많이 걸어두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간절함 때문인지 그림도 매화 그림이 좋다. 울퉁불퉁한 줄기와 뻗고 꺾인 가지에 올망졸망한 봉오리와 활짝 핀 꽃이 어울려 피어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이 생동감은 봄을 기다리는 간절함을 해소해 준다. 그림으로 감상하는 묵매화도 이리 좋은데 활짝 핀 꽃을 보는 즐거움은 무엇에 견줄까.


겨울은 왠지 쓸쓸하다. 나는 입춘을 앞두고부터 매화꽃이 필 때를 기다린다. 조만간 통도사 뜰에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홍매화가 꽃을 활짝 피웠다는 소식을 누군가 전해줄 것이다.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 교정의 와룡매(臥龍梅)도 활짝 피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꽃을 촬영하기 위해 몰려올 것이다. 나는 조용한 새벽을 틈타 교정을 찾아 용처럼 누워있는 매화 줄기와 가지에 활짝 핀 매화꽃을 보러 갈 테다. 꽃잎에 영롱한 이슬이 맺혔다면 더없이 예쁠 것이다. 바라보면서 찬란한 봄을 만끽하리라. 매화꽃 활짝 필 때를 기다리며 봄의 희망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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